28절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야곱은 다른 형들을 다 제치고 유다를 신뢰합니다.
아버지 이삭이 형 에서를 편애하면서 형제 사이의 수십 년의 갈등이 벌어지고,
본인 야곱이 라헬을 편애하다가 여자들끼리 엄청난 질투의 경주가 펼쳐지고,
요셉을 편애하다가 형들의 손에 요셉이 죽을 뻔하고,
베냐민을 편애하다가 온 가족이 기근에 굶어 죽을 뻔 했는데,
이제 야곱은 또 순서를 무시하고 유다를 앞장 세웁니다.
지금에야 르우벤이며 시므온이며 레위가 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가만히 있지만
시간이 지났을 때 무슨 소리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게까지 난리를 쳤는데 또 형들을 제치고 넷째를 앞세우다니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연약함을 질책하지 않으시고 다 사용하셔서 당신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29절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요셉이 수레를 갖추었다는 것은 총리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다 갖춘 채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권위와 위엄을 갖추었다는 말은 다음 문장에서도 증거가 드러납니다.
‘보이고’에 해당하는 원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나타나실 때나 쓰는 단어입니다.
현현(顯現, 나타나심)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는데 ‘만났다’ 정도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굳이 보여주었다는 것은
이 만남이 단순히 아들과 아버지의 재회가 아니라
(37:9) 요셉의 꿈이 오랜 시간을 지나 결국 실현되었다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마음에 간직하고 있던(37:11) 요셉의 꿈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구나 하는 아득한 감사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30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하며 최고의 만족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요셉을 그리워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보는 사람도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가슴 벅찬 장면입니다.
요셉은 마냥 감상에 젖어있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여정을 보십시오. 철저한 ‘지금, 여기’ 주의자이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가족들이 왔으니 그들을 잘 정착시키고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해야 합니다.
31절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요셉은 왕에게 보고합니다. 이제 야곱 가족의 이주는 나라의 공식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32절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34절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요셉은 가족들이 몰고 온 가축들을 전면에 드러나게 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합니다.
요셉이 그의 가족들이 가축을 치는 목자들이라는 점은 강조하려는 것은
- 첫째, 그가 친인척들을 등용할 수도 있다는 의혹을 해소하기 위함이고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이 친인척 등용의 문제점과 폐해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은
잦았습니다. 욕심을 통제하느냐, 통제하지 못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 둘째, 가족들에게 좋은 목초지를 주는 동시에
(그들에게는 상당한 숫자의 가축이 있습니다. 따로 목초지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 셋째, 애굽인들과 구별함으로써 서로가 어떤 이해관계도 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애굽인들은 이미 농경사회로 접어들었지만 야곱의 가족들은 아직까지 유목민입니다.
애굽인들은 소를 신성하게 여기지만 야곱의 가족들은 소를 드려 제사지냅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정치, 경제, 종교적인 면에서 모두 애굽인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아예 구별됨이 필요했습니다.)
말은 쉽지만, 요셉이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안전하게 정착시키기 위해
얼마나 이 모든 것을 고려하고 고심했을지를 알게 하는 부분입니다.
(2절) 요셉은 형제 가운데 다섯을 골라 바로를 알현하게 합니다.
4절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거류하다 라는 말은 (손님으로서) 머무르다, (잠시) 묵다 정도의 의미입니다. 나그네가 이리저리 떠돌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형제들은 한 목소리로 우리가 있어야 할 땅은, 최종 목표는 애굽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가나안입니다. 라고
바로 앞에서 신앙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같은 세상 앞에서 정말로 이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애굽 같은 세상의 화려함이 좋아서 여기서 천년만년 살 생각은 아니십니까?
혹은 천국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까?
신앙고백은 우리가 줄줄 외우는 문장이 고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글일 뿐이지요.
여러분의 신앙을 증명하는 것은 여러분의 삶이며, 여러분의 결정이며, 세상 앞에서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하느냐입니다.
‘나는 거류민입니다, 곧 떠날 사람입니다.’ 라는 고백은 내 삶을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6절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형제들이 담담하게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자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그들이 무엇인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전전긍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가 먼저 나서서 형제들 가운데 능력 있는 자가 왕의 가축 돌보는 일을 하라고 지시합니다.
왕의 재산을 돌보는 일을 외국인에게 맡긴다는 것은 상당한 지위와 특권을 준 것인데
사람이 애쓰고 노력하고 찔러넣고 설득하고 해서도 겨우 될까 말까 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이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형제들이 한 것이라고는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낸 것 뿐입니다.
그러면 진짜 어려운 것을 해결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7절) 이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바로를 알현하게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돌발행동을 합니다.
우리는 축복했다고 하니 그저 그런가보다, 싶지만 사실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고대 애굽의 왕, 이집트의 파라오는 신왕(神王)입니다. 살아있는 신이라고 추앙받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신하들이나 신민들이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하고 그를 축복한다고 해도
‘만세수를 하옵소서(열왕기상, 역대하, 느헤미야에 여러 번 나옵니다)’ 정도의 인사인 셈인데
지금 야곱이 하는 축복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하는 축복입니다.
그 어떤 신하도 백성도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이방인 노인이 왕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8절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왕이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바로의 강한 의문을 동반합니다.
내 평생 그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한 행동을 담담하게 하는 당신은 누구인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물어야 하는데 나이부터 물어본 것입니다.
야곱은 흐트러짐 없이 대답합니다.
9절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보아온 야곱의 인생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형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외갓집으로 도망쳐서 파란만장한 20년을 보냈습니다.
겨우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방랑은 멈추지 않았고
딸이 강간을 당하는가 하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은 줄 알고 슬픔 속에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나이 들어 늙어서는 안정은커녕 정착지를 떠나 이제 남의 나라에 와서 나그네로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의 종합 선물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야곱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 고난 중 하나만 맞아도 인생이 휘청이거나 아니면 망가질 텐데
여기까지 버텨온 야곱은 한편으로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 맞습니다.
그는 자기의 인생을 바라보며 내 삶은 험악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나그네 길이니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잠시 이 땅에 머무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전에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세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노력하고 힘쓰고 필요하면 욕심도 부리고 계략도 쓰고 하면서 온갖 짓을 다했습니다.
만약 젊은 야곱이 바로를 만났다면
그는 권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잘 보일 방법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내 삶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는 고백과 함께 세상 권세를 향해 오히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듯 축복합니다.
모든 민족이 너를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의 모형인 셈입니다.
바로는 의아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좋은 애굽의 땅을 주고 영화를 누리게 해준다는데도
이것도 마다하고 곧 돌아갈 것이다. 같은 소리나 하고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니
대체 가나안 땅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싶은 생각을 분명히 했을 것입니다.
저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이런 거룩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믿습니다.
세상의 온갖 좋은 것이 있지만 교회의 기본적인 자세는
나는 충분합니다. 더 욕심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라는 삶으로 하는 신앙고백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세상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나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나그네임을 삶으로 고백합시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 앞에서 당당히 믿음을 지켜낼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삶을 이끄시고 온전히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 간증이 넘쳐나는 우리 산정현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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