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산정현교회 신앙의 선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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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
(1897~1944)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순교자 소양(蘇羊) 주기철 목사는 서울산정현교회의 보석 같은 신앙의 선열이다.
그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순교하였다. 그는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 웅천에서 태어나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이승훈, 조만식, 이광수 등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20살이 되던 1917년에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안질환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청년운동과 교회의 집사로서 열심히 충성하였다. 김익두 목사의 마산 집회에서 성직에 대한 소명을 받았고 1925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일제 말기에 부산 초량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면서 신사참배 등을 정면으로 규탄하고 반대하다가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1936년 7월에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였고 이곳에서도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마지막 양심의 보루로 남았던 장로교마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라고 가결하자 목사직 파면의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5가지의 나의 기도"란 제목 하에 그의 유언적 일사각오의 설교를 하며 마지막까지 강단을 지키다가 1939년 9월 3차로 검속되었다. 그 해 12월 19일 평양 임시노회에서는 주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 처분을 결의 하였고 1940년 3월 24일, 평양 산정현교회당이 완전히 폐쇄당하고 가족들은 목사관 사택에서 추방당하였다.

1941년 여름, 주기철 목사는 황실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 이라는 죄목으로 10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모진 고문에 지병인 안질환의 악화와 폐와 심장병이 겹쳐 고통을 겪는 중 1944년 4월 13일에 병감으로 이감되었으며 일주일 후인 4월 21일 밤 9시에 평양 형무소 병감에서 49세의 일기로 순교하였다. 국가에서는 1968년 7월 9일에 그를 애국선열의 한 사람으로 추대하여 동작동 국립묘지에 그의 유해를 안장시켰다.
또한 우리 교단 총회에서는 1939년 평양노회에서 파면 당했던 주기철 목사의 목사직을 1997년 4월 20일에 복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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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훈 목사
1905-1948)
1905년 10월 7일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중학 교목, 용강읍교회, 송산리교회, 삼성리교회를 시무하며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렀다. 그는 네 번에 걸쳐 2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반일투쟁이 거듭되는 가운데 김철훈 목사는 일본 경찰의 꾸준한 감시를 받아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구속 수감돼 고문을 받은 애국목회자이다. 광주학생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평양 시위 주모자로 지목되어 일제에 의하여 투옥되었다. 이 같은 그의 민족애적 신앙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아버지 김경덕 목사의 철저한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1939년 농우회 사건 때는 주기철 목사와 함께 구속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농촌청년들을 규합해 반일교육을 했다는 혐의를 두고 일제가 의식 있는 사역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인 사건이다.

1942년에는 김교신의 ‘성서조선’의 필화사건으로 연루돼 고문을 받기도 했다. 해방 후 동평양교회, 산정현교회 등을 시무하는 중에 기독교도연맹 가입 반대와 주일 선거 반대로 공산당의 압박을 받았는데 이를 견디며 조만식 장로가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일원으로 비밀 월남하여 밀서를 이승만 박사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동평양교회에서의 앞날이 보장된 목회를 마다하고 산정현교회가 무너지면 평양에 있는 모든 교회가 무너진다며 고생길을 자처했다. 격동의 세월을 살았던 김철훈 목사는 이후 공산당에 대항하다가 1948년 산정현교회에 부임한지 5개월 만에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44세의 일기로 순교했다.

"나는 순교를 각오한 사람이기에 이왕이면 주기철 목사님이 서시던 강단에서 죽으면 얼마나 좋으냐. 무릉도원 놓고 가시밭길 가는 심정 이해해 달라. 한국교회의 목사로 이해해 달라." 김철훈 목사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부인 연금봉 사모는 김철훈 목사의 순교 후 세 자녀를 업고 대동강을 건너 남으로 피란을 왔다. 연 사모는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순교자 유족들을 위해 도움을 요청했고, 그 자리에서 헌금을 받아 순혜원(순교자 유족을 위한 쉼터)을 세웠다. 1956년에는 함께 남하한 평양 산정현교우들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남편의 뜻을 담아 현 서울산정현교회를 재건한 뒤 전도사로 줄곧 섬겼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공산당의 핍박으로 순교한 목회자 사모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던 연금봉 사모는 지난 2013년 11월 20일 향년 104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dot.png 유계준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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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계준 장로
(1879-1950)
유계준 장로는 1879년 4월 3일 평남 안주에서 불신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13살에 평양으로 나왔다. 그 후 평양의 한 무역상의 사환으로 들어가 10여 년간 일하다 윤덕준 권사(1885~1975)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러하다. 미국인 선교사 사무엘 모펫이 평양시내에서 전도하는 것을 보고 선교사를 구타하는 등 선교를 방해하였으나, 그렇게 맞고도 예수 믿으라고 권유하는 그에게 설복되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 그 후 평양에서도 유서 깊은 산정현교회의 교인이 되면서 한경직, 길선주, 주기철, 김규찬 목사 조만식, 오윤선, 안창호 장로들과 가까이 교제하며 어두워져 가는 한국과 한국교회를 밝힐 횃불이 되기로 결단하였다.

특히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44년 4월 감옥에서 순교할 때까지 5년 4개월을 한 결 같이 그의 옥바라지와 가족 뒷바라지를 맡아 해냈다. 결국 이 일로 평양 경찰서에 소환되어 일본인 경찰들에게 협박당하면서도 "우리교회가 교역자라고 모시고 있는 목사님이 지금 감옥에 들어가 고생을 하고 계시는데 그 가족의 생활비마저 어떻게 안 드릴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산정현교회가 이렇게 시대를 이겨 나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묵묵히 옹호하는 장로들의 힘이 컸다. 유계준 장로를 비롯한 조만식, 오윤선 장로들은 담임목사가 행여 항복하거나 배절 할까봐 걱정할 정도로 정신적 기반이 든든했다. 당시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였던 유계준 장로는 사재까지 들여가며 교회의 일을 도모해 나갔으며, 특히 주기철 목사가 순교하자 일제의 금지령을 어기고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해방 후 공산정권이 교회를 적산가옥이라고 압수하자 자신의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했다. 6.25당시에는 가족들을 남하시키고 혼자 교회를 지키다가 평소 자녀들에게 일러온 '한 알의 밀알이 되라'는 가훈대로 1950년 10월 퇴각하는 공산군에 의해 순교했다.

유계준 장로는 슬하에 8남매(6남2녀)를 두었는데, 증손자까지 합하면 106명에 이른다.
  • 1남 유기원 - 하버드大박사 (국립의료원 원장)
  • 2남 유기형 - 서울대 치과의사 (기독의사회장)
  • 3남 유기선 - 의사, 박사, (경성약전, 서울대의대, 서울대법대 졸)
  • 4남 유기천 - 서울법대학장, 제9대 서울대총장
  • 5남 유기진 - 의사, 박사
  • 6녀 유기옥 - 의사, 박사
  • 7녀 유기숙 - 약사, 박사 숭실대총장
  • 8남 유기묵 - 의사, 박사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시편 37: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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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장로
(1882-1950)
민족의 큰 별, 고당 '조만식'장로는 온 겨레가 일제의 질곡에서 우리의 민족성을 상실해 가고 있을 때 기독교적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순교자적 삶을 산 진실한 애국자였다. 그는 1882년 음력 12월 평안남도 강서에서 명문가 조씨 가문의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5세가 되면서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인수업을 받고 무명과 베를 파는 포목점을 운영하면서 상인의 길로 들어섰다. 1904년 발발한 러-일 전쟁은 상인으로 안주하고 살던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피난전의 대열에서 그의 동업자 한정교와 토론을 통하여 그는 기독교의 박애사상과 인도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그는 그때까지의 옛사람을 버리기로 결단하고 평양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그때까지 즐기던 술과 담배를 끊고 한정교의 인도로 '산정현교회'의 전신인 '장대현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그는 복음을 통하여 그 진리의 말씀에 크게 감화하였다. 그는 약관 23세의 나이에, 더구나 식솔이 딸린 가장으로 만학의 길에 올랐다. 평양숭실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을 갖추게 되었으며 모범 만학도였다. 그의 향학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선진법률제도를 연구하여 조국의 국정에 참고하겠다는 생각에서 일본 명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청년 조만식은 당시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대표적 인물로서 흩어진 동포기독학생들과 함께 동경 YMCA 건물 안에 <제일 조선인 교회>를 설립, 조국의 운명을 위해 매주 예배와 기도모임을 이끌어갔다. 1913년 귀국과 동시에 그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9년간 교육에 헌신했다.

그의 제자 가운데 한국교회에 크게 영향을 끼친 두 분 목사를 들 수 있는데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순교한 주기철 목사이고 또 한사람은 한경직 목사이다. '물산장려운동' '신간회 창립' '3.1만세운동'주도 등 그의 혁혁한 독립운동 뒤에는 신앙의 힘이 컸다. 그는 '산정현교회'장로로 추대되면서 산정현교회 김동원 장로와 함께 YMCA를 조직, 기독교 청년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언론계에 투신하여 조선일보사 제8대 사장을 역임하였다. 괄목할 만한 사실은 조선일보 경영진 8명중에 4명이 당시 산정현교회 장로와 집사들이었다. 그 무렵 '산정현교회'는 민족주의자가 많기로 평양내서 으뜸이었으며 특히 1938년부터 7년간의 '신사참배반대' 투쟁은 당회원들과 제직들의 피와 눈물의 결과였다.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가족들만 남하시킨 채 자신은 일천만 북한 동포들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결단, 끝끝내 남하를 거부하였다. 민족의 별 '조만식 장로', 그가 가족들과 소식이 끊긴지 40년만인 1991년에 이르러서야 1950년 10월 18일 평양에서 학살되었다는 비보가 비로소 남한에 전해졌다. 그의 유해는 지금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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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숙 전도사
(1917-1950)
백인숙 전도사는 1909년 평북 신의주에서 출생하였다.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준비된 여성 지도자였던 그녀는 1939년 주기철 목사가 투옥된 이후 오정모 사모와 함께 산정현교회 교우들을 돌보는 일에 대단히 헌신했다. 어릴 때부터 신앙 안에서 성장한 백인숙은 안동여자중학교와 평양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일본에 건너가 요코하마 여자신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30세 나이에 산정현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는데 당시에는 전도사의 호칭이 없었으므로 권사라고 불렀다.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어 옥에 있는 동안 백인숙은 밤이면 교회당에서 기도하고 낮이면 부지런히 교인 가정을 심방하였다. 산정현교회가 일제에 의하여 문이 닫힌 후에도 교인 가정을 일곱 구역으로 나누어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한 구역씩 찾아가 예배를 인도하곤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후 백인숙은 전도사로서 오정모 사모와 함께 산정현교회를 복구하는 일에 혼신을 다했다.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에 여름 옷 한 벌과 겨울 옷 한 벌밖에 없었다. 여름에는 검정 치마에 모시 적삼을, 겨울에는 검정 치마에 무명 저고리를 즐겨 입었다. 이렇게 그녀는 자신을 위하여는 엄격하게 인색하였으나 타인을 위해서는 너그러웠고 풍부했다. 이런 이타적인 사랑은 교회사랑과 나라사랑으로 이어져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기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해방 후 산정현교회가 평양노회 가입 문제와 민족주의 및 신앙주의 노선 문제로 갈등을 빚을 때 민족주의 성향 쪽에 서 있었다.

주기철 목사 순교 후 1948년 2월 부임한 김철훈 목사가 공산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소식이 끊긴 후에는 김 목사의 부인 연금봉 사모와 숙식을 같이하면서 주 안에서 위로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과거 주기철 목사가 투옥되었을 때에도 오정모 사모와 함께 힘을 모아 교우들을 돌보던 아름다운 모습을 이번에도 변함없이 보여주었다. 1949년 김철훈 목사가 순교하고 이어서 부임한 정일선 목사마저 공산정권에 순교하자 백인숙은 산정현교회 목회자들과 교우들을 독려하며 공산정권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기독교연맹 가입을 거부하였다. 철저한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데다 신앙의 절개를 끝까지 지켜 갔던 백인숙은 참으로 순결한 신부였다.

산정현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담임목사를 체포하고 핍박이 그치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교인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공산정권은 아예 백인숙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1950년 6월 25일 사변 며칠 전 그녀를 체포하였다. 공산정권은 백인숙을 회유하고 달랬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그러자 그들은 깊은 구덩이를 파고 위협하여 그녀를 그 안에 넣고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국교회가 낳은 훌륭한 여종, 34세의 처녀 백인숙 전도사는 이렇듯이 정결한 몸으로 우상을 대표하는 강포한 일본의 위력을 믿음으로 이겨냈으며, 무신론의 포악한 공산당의 만행을 일편단심의 신앙으로 물리치고 피로써 사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