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산정현교회 교회사기(敎會史記) 원문
 
dot.png 주후 1906년 1월 7일
본교회가 설립되었다.
원래 우리 조선에 기독교가 처음 알려진 것은 주후 1600년경 외부의 전래가 아닌 스스로 연구함으로 알려지더니 1884년 미국 북장로 교회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경성에 와서 예수의 복음을 각처에 전파하였고 그 후 여러 명의 선교사가 속속 도래하던 중 1890년 1월 25일 마포삼열(Moffet)선교사가 경성에 왔다가 같은 해 10월 평양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1893년 2월에 평양으로 이사하며 대동문 내 판교동에 거처를 정하고 열심으로 선교하면 교우들이 증가함에 따라 위 선교사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수년 후 서문 밖으로 이사하고 판교동 옛집을 예배당으로 사용하더니 1899년에 이르러 장대현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가 이사하니 비로소 장대현교회의 이름이 시작되었다. 이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신도가 날로 증가하여 한 번에 다 모이기가 어렵게 되어 1903년 가을에 남문밖에 교회를 개척하고 1905년 봄에 창동교회를 또 개척하더니 다음해 초 본 교회를 또 분립하여 세우니 평양성내 4번째 교회가 세워졌다. 설립 초에 구역은 동으로는 대동강에 이르렀으며, 남으로는 육로리로부터 남산현까지, 서쪽으로는 서문가를 지나 장별청로에 이르렀고 북으로는 승령전으로 대동강을 관통하여 대동문에 이르렀으니 800~900호 중에 신도는 100인 미만이었다.

예배당은 판교동 마포삼열 선교사 구저를 다시 사용하고 직원으로는 미국인 선교사 편하설(C. F. Bernheisel)을 영수는 계택선, 이덕환 두 분을 집사는 최정서, 김용흥, 정이도 세 명을 권사는 이덕환의 모친 이신행을 선정하고 겨울에 조사 선정하니 한승권 씨가 선인되었다. 정식예배는 매주일 오전에 성경공부 모임으로 모이고 오후에는 강도예배를 모이고 저녁에는 찬양예배로 모이고 매 수요일 저녁에 기도회로 모였다. 절기는 감사주일, 성탄주일, 부활주일로 지키고 교회재정은 매주일 통상 연보와 각종 특별헌금으로 사용하였다.

본 교회 설립이래로 주님 은혜가 풍성하셔서 일 년 동안에 남녀교우가 300여명에 달한지라. 헌금을 모아 성내 응흥면 삼리 학동의 서편 "산정현"위에 터를 정하고 예배당을 신축하니 그 공사는 마포 삼열 선교사와 김문준, 김용흥 양씨가 간역(감독)하고 공사비는 천여원이요, 건축평수는 56평이다. 여름 6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인 9월에 준공하고 교회를 옮기니 이후부터 본 교회를 "산정현교회"라고 불렀다. 봄에 영수 이덕준 씨는 장대현 교회로 옮겨 갔고
여름에 선교사 편하설 씨는 안식 차 귀국하고 김일선 씨(방계선의 처)를 부인권사로 선정하여 이신행 씨와 함께 일하게 하다. 이 해에 직원은 선교사 편하설, 조사 한승곤, 영수 계택선, 집사 최정서, 김응홍, 정이도, 최효원, 김동원, 병흥삼, 박정익 제씨더라.
dot.png 1908년(무신년)
교회는 점점 성장하고 1월 19일에 영수 계택선, 조사 한승곤 양씨를 장로로 장립하니 당회가 이루어졌다.
가을에 선교사 편하설 씨가 돌아오셨다. 이 해의 직원은 선교사 편하설, 장로 계택선, 한승곤, 조사 겸 영수 변흥삼, 김동원, 김상은, 집사 최정서, 김용흥, 박정익, 양성춘, 김찬두, 김봉순, 장석주 제씨더라.
dot.png 1909년(기유년)
교회는 점점 성장하고 남녀권찰을 두어 각 구역을 나우어서 돌보고(분할 하에 간호함), 매월 초에 회집하여 보고하게 하니 이는 권찰회의 시작이더라.
이해의 직원은 여전하던 중에 11월 13일에 영수 김상은 씨가 별세하셨다.
dot.png 1910년(경술년)
8월 28일에 영수 김동원 씨를 장로로 장립하고 가을에 백만 명 부흥회가 시작하여 교우가 증진했다.
직원은 선교사 편하설, 장로 계택선, 김동원, 한승곤, 조사 겸 영수 변흥삼, 박전익, 김찬두, 집사 최정서, 김용흥, 양성춘, 김봉순, 장석주 제씨더라.
dot.png 1911년(신해년)
교회는 점진하고 직원은 여전하던 중에 김정려 씨가 집사로 가입하고 한승곤 씨는 신병이 있음으로 계택선 씨가 조사를 임시로 대신했다.
dot.png 1912년(임자년)
교회는 여전하다가 이른 봄에 장로 김동원 씨를 경선 총감부(조선 총독부의 전신)에서 납치하여 제반 악형을 가하고 감옥에 구인(가둠)하니 이는 조선교회 핍박 즉 105인 사건이다. 옥중에서 이해를 보내고 6월에 장로 계택선 씨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장천교회'목사로 부임하게 되니 본 교회 직임은 해면되었다. 7월 7일에 선교사 김찬두 씨를 장로로 장립하다 이해의 직원은 선교사 편하설, 장로 계택선, 김도원, 김찬두, 한승곤, 조사 겸 영수 박정익, 변흥삼, 집사 최정서, 김요흥, 양성춘, 기봉순, 장석주, 김정례 제씨더라.
dot.png 1913년(계축년)
교회는 여전하다.
1월 5일에 신학교 졸업생인 장로 한승곤 씨를 본 교회 목사로 장립하고 2월 9일에 영수 박정익 씨를 장로로 장립하고 2월 20일에 장로 김동원 씨가 무죄로 석방되어 돌아왔다.

겨울에 권사 이신행 씨가 연세가 너무 많아 직무를 쉬게 하고 직명만을 남게 하다. 여름에 종각을 건축하고 미국의 교우들이 기부한 종을 달다.
12월 10일에 부인 교우 중 김열심 노인이 자기 소유인 밭 사흘갈이와 논 4두락을 교회에 기부하다. 이 해의 직원은 선교사 편하설, 목사 한승곤, 장로 김종원, 김찬두, 박정익, 영수 변흥삼, 집사 최정서, 김용흥, 양성춘, 김봉순, 장석주, 김정렴, 김건보, 유계삼 제씨이다.
dot.png 1914년(갑인년)
교회는 여전하다.
3월 25일에 부인교우 박문성시가 자기가 소유했던 밭 하루 반 갈이를 교회에 기부하다. 그 전부터 주일 오전 성경공부에 장년반과 유년반이 있었는데 근래에 유년반을 특별히 주의하여 가르치니 이는 유년 주일학교의 시작이 되었다. 여름에 선교사 편하설 씨가 안식 차 귀국하시다. 이해의 직원은 증감이 없고 여전히 시무하다.
dot.png 1915년(을묘년)
교회는 여전하고 1월 31일에 영수 변흥삼 씨를 장로로 장립하니 이후로는 영수직을 두지 않았다.
본교회가 설립된 첫해의 경비가 200여원이더니 그 용도가 해마다 증가하여 금년 경비는 700여원에 달했다.
가을에 편하설 씨가 돌아와서 미국교인의 의연금 2000원을 본 교회에 기부하여 예배당 터를 사서 확장케 하였다.
이 해의 직원은 선교사 편하설, 목사 한승곤, 장로 김동원, 김찬두, 박정익, 변흥삼, 집사 최정서, 김용흥, 양성춘, 김봉순, 장석주, 김건보 제씨더라.
dot.png 1916년(병진년)
교회는 여전하고 3월 11일에 목사 한승곤 씨가 시무를 사면하고 미국으로 가셔서 3월 16일부터 목사 안봉주 씨를 임시로 초빙하여 3개월간 시무하다.
이 해의 목사 이외의 타 직원은 지난해와 같다.
dot.png 1917년(정사년)
교회는 여전하고 6월 17일에 신학교 졸업생인 선천읍교회 장로 강규찬 씨를 청빙하여 본 교회 목사로 장립하고 동월 24일 주일에 위임식을 거행하고 예배당 서쪽의 가옥을 매수하여 목사 가족을 이사케 하다. 당시의 교회 상황은 남녀교우(세례, 학습, 원입 병합) 600여명인데 매주일 출석이 400여명이었다. 당회원이 6명이고 제직원이 14명이고 여권사가 1명이며 권찰구역 12구에 남녀권찰 36명오, 주일 공부반은 장년남반이 12반, 여반이 16반, 유년반은 남녀 각 2반이고 1년 경비는 1000여원이고 간간히 남녀 전도인을 세워 몇 개월씩 전도하다. 7월 23일 김건보 집사가 별세하다. 겨울에 황주읍교회 목사 정명리 씨를 청빙하여 1주간 사경회(현재의 부흥회와 성경공부)를 하다. 이해 직원은 선교사 편하설, 목사 강규찬, 장로 김동원, 김찬두 박정익, 변흥삼, 집사 최정서, 김용흥, 양성춘, 김봉순, 장석주, 김건보, 이근섭, 우정순, 이영칠 제씨더라.
dot.png 1918년(무오년)
교회는 날로 성장하다.
1월 6일에 집사 양성춘 씨를 장로로 장립하다. 이때에 예배당이 협착하여서 40여 평을 증축하니 감독은 이영칠 씨였고 공사비는 4000여원이었다.
4월에 착공하여 8월에 준공하였다. 유년주일학교를 확장하니 남녀학생이 200여명이었다. 장로 김동원 씨를 교장으로 선정하고 남자 청년 전도회를 조직했다. 겨울에 안주읍교회 목사 김찬성씨를 청빙하여 일주일간 사경회를 했다. 이해의 직원은 선교사 편하설, 목사 강규찬, 장로 김동원, 김찬두, 박정익, 변흥삼, 양성춘, 집사 최정서, 김용흥, 김봉순, 장석주, 이근섭, 우정순, 이영칠, 오윤선, 김예진 제씨더라.
dot.png 1919년(기미년)
교회는 점점 성장하다.
3월 1일에 조선독립운동 사건으로 목사 강규찬 씨와 집사 김예진 씨와 교인 조만식 씨가 체포되었으니 몇 달 후에 김예진 씨는 탈출하여 외국으로 나가고 조만식 씨는 평양감옥에서 징역하고 강규찬시는 경성감옥에서 징역하되 교우는 증가하였다. 이해의 직원은 선교사와 목사와 장로는 여전하고 집사는 최정서, 김용흥, 김봉순, 장석주, 우정순, 이영칠, 오윤선, 김순도, 오응백 제씨더라.
dot.png 1920년(경신년)
3월 13일 조만식 씨가 출옥하여 귀가하고 4월 10일에 강규찬 씨가 출옥하여 귀가하여 본 교회 목사로 계속하여 시무하다.
이 해에 유년주일학교를 학장하고 여자청년전도회를 조직했으며 유치원을 설립하고 판교동의 구예배당에서 가르치다.
교우 김정렴 씨는 자기 부인의 유언에 의하여 500원을 기부하고 부인교우 김삼복 씨는 종 한 개를 교회에 기부하니 이는 그전 종이 파손되었기 때문이었다. 12월 21일에 신학졸업생인 장로 양성춘을 명촌교회 목사로 장립하니 본 교회의 직임은 해면되었다. 이해의 직원은 작년과 같았으나 최석종 한 사람만이 집사로 가입되었다.
dot.png 1921년(신유년)
교회는 점점 더 성장하다.
목사주택에 달린 대지를 사서 확장하고 주택을 개조하니 그 비용이 3천여 원이었다.
여름에 선교사 편하설 씨가 안식차로 귀국했다. 겨울에 선천 길종수 목사를 청빙하여 일주일동안 사경하고 부인 전도인을 두어 본 구역 내에서 전도하게 하다.
이해의 직원은 선교사 편하설, 목사 강규찬, 장로 김도원, 김찬두, 박정익, 변흥삼, 집사 최정서, 김용흥, 김봉순, 장석주, 우정순, 오윤선, 오응백, 송민호, 유계준, 조만식 제씨였다.
dot.png 1922년(임술년)
교회는 점점 성장하고 6월 18일에 집사 오윤선 씨를 장로로 장립하다.
가을에 선교사 편하설 씨가 돌아오면서 종 한 개와 풍금 한 대를 교회에 기부하니 종은 편 씨의 고향목사가 기부한 것이고 풍금은 편 씨 부인의 친구가 보내준 것이다. 그것은 예종과 예풍금이 파손되었기 때문이었다. 집사 최정서 씨가 수십만 원의 자금으로 유치원을 전담하여 건설하고 본 교회 유치원으로 인계함으로 본 제직회가 그 성의를 감사하여 '정의 유치원'이라 명명하고 유치원 벽에 최 씨의 사진을 걸었다. 겨울에 개성의 김상준 목사를 청빙하여 일주일간 사경했다. 신찬 씨를 부인권사로 선정하여 김일선 씨와 함께 일하게 했다. 이 해의 직원은 선교사 편하설, 목사 강규찬, 장로 김도원, 김찬두, 박정익, 변흥삼, 오윤선, 집사 최정서, 김봉순, 김용흥, 장석주 우정순, 오응백, 송민호, 유계준, 조만식, 제씨였다. 12월 31일에 조만식 씨를 장로로 장립하다.
dot.png 1923년(계해년)
교회는 점점 성장하고 1월 28일에 집사 최정서, 김봉순 양씨에게 장립식을 거행하니 이후로 장립집사가 생기다.
6월 17일에 집사 최정서 씨를 장로로 장립하다. 당시의 교회 상황을 살펴보면 노소남녀를 합하여 1000여명인데 매주일 전 출석이 700여명이오, 오후 출석이 700여명이오, 오후출석이 500여명 가량이오, 당회원은 9명이고 제직원은 18이오, 권찰 14구역에 남녀권찰이 56명이오, 주일 공부반은 장년 남반이 20반이며 여반이 30반이오, 유년주일학교는 학생이 300명가량이고 교회경비는 300여원에 달하고 여전도(사) 두 분을 세워 8개월씩 전도하고 겨울에 미국인 '비드 월푸'박사를 맞이하여 일주일간 장로-감리 양 교회연합 대 부흥성회를 함으로 교우가 증진했다. 이해의 직원은 선교사 편하설, 목사 강규찬, 장로 김동원, 김찬두, 박정익, 변흥삼, 오윤선, 조만식, 최정서, 집사 김봉순, 김용흥, 잔석주, 우정순, 오응백, 송민호, 유계준, 박용복, 이찬두 제씨더라.
dot.png 1924년(갑자년)
세초에 오경처 노인이 전도기금으로 금화 500원을 교회에 기부했다.
1월에 여 집사 7명을 당회에서 자벽 선정하니 박문성, 이영선, 김경성, 전복희, 최수락, 송안라, 조은식 제씨이니 이들은 처음 여 집사들이다.
장립집사 5명을 투표 하에 선출하니 우정순, 유계준, 오응백, 송민호, 이찬두 제씨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