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산정현교회는 평양 장대현교회를 모교회로 하여 세워진 평양 산정현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평양 산정현교회는 당시 부흥을 거듭하던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1905년에 분립되어
평양시 닭골에 설립되었고 당시 ‘평양성 제4교회’라고 불렸습니다. 예배당은 옛날 마포삼열 선교사가 살던 판교동 집을 사용하였는데, 1년 후에는 교인이 300명으로 늘어나 평양성 내 닭골 산정현 위에 1,000여원의 공사비를 들여 56평의 규모로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산정현교회라 이름 지었습니다.
산정현교회는 그 후 계속 부흥하여 당시 평양뿐만 아니라 조선 전국에서도 가장 큰 교회로 알려지게 되었고, 1938년 2월 8일에는 대지 967평에 건평 414평으로 2층 벽돌의 웅장한 새 예배당을 완공하여 헌당식을 갖기도 했습니다. 평양 산정현교회 안에는 민족주의의 많은 지도자들이 속해 있었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본부 역할을 다 했습니다. 이는 그 어려운 시대의 핍박과 압박 속에서도 당회와 제직회가 순교정신으로 일치했으며 환난 당한 성도들이 사랑으로 결속한 일체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산정현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항거하다 투옥당하여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방계성 목사, 유계준 장로, 양재영 장로, 김철훈 목사(1949년 북괴요원에게 체포됨), 조만식 장로, 백인숙 전도사(여), 김현석 장로, 정일선 목사 등 공산군에 의해 순교한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한 교회입니다.
한편 신사참배를 동조했던 친일 교역자들과 제휴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던 교인들은 해방 후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모여 수개월의 진통을 겪은 후, 마침내 교회를 이탈하여 신양리 양촌의 양재연 장로의 목장에서 따로 모였으며, 그 후 1949년 5월에 이기선 목사는 독노회 조직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평양 산정현교회는 이기선 목사 측의 독노회와는 달리 기존의 평양노회로 다시 복귀하게 됩니다. 6.25전쟁 발발로 인하여 평양 산정현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남하하였다가 휴전이 되면서 1956년 2월 첫 주일에 서울에서 산정현교회를 재건하기로 하고 모여 오늘의 서울산정현교회를 세우고 헌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 선열들의 위대한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오늘날의 서울산정현교회는 이 시대의 순교자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선열들이 뿌린 순교의 씨앗을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맺기 위해 거룩한 꿈을 품고 함께 노력하는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물질과 탐욕, 이익에 따라 양심마저 져버리는 가치 혼란의 시대에, 서울산정현교회는 모든 우상과 거짓과 비 진리를 버리고 성경과 신앙 선열들의 가르침을 따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며, 세상에서는 복음과 섬김으로 영혼을 구원하고 바른 사회를 이루어 가는 민족의 횃불 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온 교우들이 함께 헌신하고 있습니다.
평양시 닭골에 설립되었고 당시 ‘평양성 제4교회’라고 불렸습니다. 예배당은 옛날 마포삼열 선교사가 살던 판교동 집을 사용하였는데, 1년 후에는 교인이 300명으로 늘어나 평양성 내 닭골 산정현 위에 1,000여원의 공사비를 들여 56평의 규모로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산정현교회라 이름 지었습니다.
산정현교회는 그 후 계속 부흥하여 당시 평양뿐만 아니라 조선 전국에서도 가장 큰 교회로 알려지게 되었고, 1938년 2월 8일에는 대지 967평에 건평 414평으로 2층 벽돌의 웅장한 새 예배당을 완공하여 헌당식을 갖기도 했습니다. 평양 산정현교회 안에는 민족주의의 많은 지도자들이 속해 있었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본부 역할을 다 했습니다. 이는 그 어려운 시대의 핍박과 압박 속에서도 당회와 제직회가 순교정신으로 일치했으며 환난 당한 성도들이 사랑으로 결속한 일체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산정현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항거하다 투옥당하여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방계성 목사, 유계준 장로, 양재영 장로, 김철훈 목사(1949년 북괴요원에게 체포됨), 조만식 장로, 백인숙 전도사(여), 김현석 장로, 정일선 목사 등 공산군에 의해 순교한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한 교회입니다.
한편 신사참배를 동조했던 친일 교역자들과 제휴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던 교인들은 해방 후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모여 수개월의 진통을 겪은 후, 마침내 교회를 이탈하여 신양리 양촌의 양재연 장로의 목장에서 따로 모였으며, 그 후 1949년 5월에 이기선 목사는 독노회 조직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평양 산정현교회는 이기선 목사 측의 독노회와는 달리 기존의 평양노회로 다시 복귀하게 됩니다. 6.25전쟁 발발로 인하여 평양 산정현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남하하였다가 휴전이 되면서 1956년 2월 첫 주일에 서울에서 산정현교회를 재건하기로 하고 모여 오늘의 서울산정현교회를 세우고 헌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 선열들의 위대한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오늘날의 서울산정현교회는 이 시대의 순교자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선열들이 뿌린 순교의 씨앗을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맺기 위해 거룩한 꿈을 품고 함께 노력하는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물질과 탐욕, 이익에 따라 양심마저 져버리는 가치 혼란의 시대에, 서울산정현교회는 모든 우상과 거짓과 비 진리를 버리고 성경과 신앙 선열들의 가르침을 따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며, 세상에서는 복음과 섬김으로 영혼을 구원하고 바른 사회를 이루어 가는 민족의 횃불 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온 교우들이 함께 헌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