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제의 본문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열매,즉 삶의 열매를 맺는 삶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그러한 삶의 목적지는 (13절)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우리는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나아가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살펴 봅시다.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직역하자면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늘 많은 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것들을 못 보며 삽니다.
너무나 거대해서 우주를 다 보지 못합니다. 너무나 작아서 보지 못하는 우주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도 다 보지 못합니다. 영적 세계도 분간하지 못합니다.
물론 보지 못한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도 분명히 있고 영적 세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못 보는 것일 뿐입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을 못 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영적 세계도(영), 사람의 마음도(혼) 가시적인 우주(육)까지 모두 포함하는 만물에서만도
사람이 못 보는 것이 너무나 많은데
이 만물보다 더 위에 계시는, 더 앞서가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은혜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볼 가능성이 전혀 없었으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말씀하십니다.
15절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먼저 났다는 이 단어에 갇히면 자칫 하나님의 존재를 순서로 따지는 오류에 빠집니다.
흔히들 말하는 ‘원인이 없는 결과가 어디에 있나? 하나님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
누가 하나님을 존재하게 했나?’ 식으로 도발을 하게 됩니다. 볼 줄 몰라서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어리석은 도전을 미리 알기라고 했다는 듯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위에’ 계신 분이시라고 선을 긋습니다.
먼저 나셨다는 것은 시간상의 문제가 아니라 권위의 문제입니다.
이 단어의 뜻을 놓치지 않아야 16절과 17절, 18절까지도 자연스럽게 연결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게 할 정도의 권세와 능력이라면
당연히 모든 피조물보다 우월해야만 합니다.
(16절)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 주권, 통치자, 권세자, 만물보다 우월해야 합니다.
(17절) 만물보다 앞서야 합니다. 만물도 그의 ‘안에’ 있을 뿐입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18절) 여기까지 설명해도 이해를 못하는 독자들이 있을까봐 바울은 직접 결론을 수놓습니다.
그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는 단순히 권위가 있는 분 정도가 아닙니다.
(16절) 만물이 그리스도의 영역 안에서 창조되었고, 창조의 기원이 곧 그리스도이시고, 창조가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고백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익혀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체험입니다.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마주하고 고백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요, 20:28) 이시라는 신앙고백은
세대를 뛰어넘어 오늘, 우리를 울리고 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랬기에 엄청난 선교 여정을 감당하고,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편지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오히려 (11절)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엄청난 능력과 권세, 영광을 (18절) 교회에 허락하셨습니다.
교회를 통해 그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예수 안에서 충만하게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19절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바울은 19절에서 충만, 원어로는 완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언어생활은 불신자들과는 사용하는 단어 자체가 다릅니다.
단적인 예로 은혜롭다. 간증하다 같은 단어는 (우리는 전혀 체감하지 못하지만) 결코 일반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슬쩍 지나가는 그런 표현만 들어도 예민한 사람들은 ‘아, 이 사람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구나’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유물(專有物)이라는 표현이 맞겠지요.
놀랍게도 이 ‘충만’은 초대교회의 단어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단어도 아닙니다.
원래 이 단어는 영지주의자들의 전유물입니다. 그들의 핵심 단어이고 그들의 구호였습니다.
천주교인들이 사용하는 피정(避靜)이나 불교인들이 사용하는 보시(普施) 같은 단어의 뜻을
일반인들이 잘 모르거나 안 쓰는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바울은 대담하게 의도적으로 이 ‘충만’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누가 들어도 알았을 것입니다. ‘저 말은 영지주의자들의 표어인데?’
바울은 대담한 도전을 통해 진정한 충만은 영지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라 바로 예수 안에 거하는 것임을 거꾸로 강조합니다.
자신감 있는 도전입니다. 체험한 자만 알 수 있는 도전입니다.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마치 맛있는 음식을 예전에 먼저 먹어보고
다른 이들에게도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그런 확신입니다. 내가 체험해 봤다! 는 말입니다.
완벽하고 충만한 것은 영지주의자들의 뜬구름 잡는 소리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 안에만 존재한다는 구원의 선포, 진정한 충만을 체험한 자의 선포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은 바로 (19절 a)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앞의 9절에서도 본 것처럼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20절)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예수)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충만함을 이루시고 화평을 완성하십니다.
복음은 개인을 넘어 교회를 넘어 이제 온 세상을 향해 전파되었습니다.
(23절) 우리가 그 믿음의 기초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으면
(22절)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이들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소망을 붙잡고 오늘도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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