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절 이렇게 큰 글자로 보라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한 번씩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학자마다 분분하긴 한데 바울 자신이 직접 썼다는 것을 인증하기 위한 일종의 서명이라는 의견이 전반적입니다.
요즘이야 자필 서명이 흔한 일이지만 바울 당시만 해도 참신한 개념이었습니다.
‘내가 직접 썼습니다. 내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내가 보증합니다.’
정도의 표현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관통해서 보아야 하는 핵심은 이 편지에 담겨 있는 바울의 절절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당신들이 심지어 나를 거부하고 비방하더라도 당신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내 마음만큼은 진심입니다.
라는 이것이 어디 바울 개인의 인간적인 마음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가능한 마음입니다.
12절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사도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총정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입니다.
(15절) 완전히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 즉 거듭나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외적으로 율법을 행하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면이 다시 태어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죄인이고 하나님의 원수인데 겉만 번지르르하게 덧칠을 한다고 해서
(12절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여인들의 화장, 혹은 덧칠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대단한 의미가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육체의 모양, 즉 할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행위는 결코 구원을 위한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행위로 따지면 바울도 결코 밀리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수고의 씨앗을 뿌렸습니까?
당장은 보이지 않습니다. 자라고는 있을까, 의심스럽고 아프고 힘든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씨앗은 분명히 심겨졌고, 분명히 자라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가 나눈 것처럼 (9절) 선을 행할 때, 구원의 뜻,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인지라 지칠 때도 있습니다. 낙심할 때도 있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겠지요.
그때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나는 내 아들 예수의 피로 너를 구원한다! 라는 (17절) 예수의 흔적입니다.
17절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그분의 손과 발에 남은 흔적입니다. 낙인과 같은 흔적은 생명, 영원한 생명의 보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완전히 부활하신 것이 맞습니다.
병상에 누워서 컨디션을 회복 중이다, 혹은 반만 살아났다 이런 개념도 아닙니다.
완벽하게 다시 살아나셨고 상처도 다 회복되셨습니다.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부활이 진행이 되다가 만 것입니까? 완벽하게 회복하시려면
손과 옆구리의 구멍도 다른 찢어지고 터진 상처처럼 다 봉합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말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리고 그분의 상처를 목격하며 고꾸라진 도마가 고백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놀라운 고백이 수천년을 이어내려온 교회의 고백이 됩니다.
주님의 흔적, 주님의 상처는 단순한 상처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찬송한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손과 몸의 상처를 보면서
이분이 나를 위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해내셨는지를 깨닫고 알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상처는 구원의 표지가 됩니다.
바울이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에 이루실 구원 사역을 위해 입은 상처이며 영원한 구원의 표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표지를 의도적으로 남기셔서 오고가는 모든 세대가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우리에게도 권면하십니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상처입고 아프고 힘든 일들 많이 있지만 과연 나를 위해 입은 '상처뿐인 영광'인지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구원 사역을 위한 '영광의 상처'인지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16절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갈라디아서를 계속 읽고 있노라면 마치 율법과 할례가 나쁜 것인양 느껴질 지경입니다.
바울은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의 폐해를 말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바울이 논하는 규례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법입니다.
1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가 신앙의 초보자들에게 훌륭한 입문서와 같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14절 같은 경우도 마치 눈 앞의 칠판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훌륭한 설명입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새로운 계명은 십자가의 계명입니다. 사랑의 계명입니다.
예전에는 세상의 평가가 중요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중요했는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오시고 난 이후에는 그 모든 평가며 시선이 다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세상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율법이라는 겉치레 뒤에 숨어 있는 나의 욕심, 나의 자아, 나의 정욕과 위선까지 모두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마지막 18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8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은혜는 육체에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도록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겉치레를 통해 임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심령에 오십니다.
그러나 역사를 바꿉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늘 그런 식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의 주권과 권세와 지배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나라와 민족, 정권, 사상, 철학 등
눈에 보이는 인간의 모든 것을 통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심령에 오십니다.
이래서야 언제 일을 하실까 싶지만 어느새인가 정신을 차려보면
보이지 않는 심령에 오시는 그 은혜로 인해 사람이 변화합니다.
가정이 변화합니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바뀝니다. 구원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사도는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교회를 초대합니다.
18절 자체가 축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누리는 최고의 복을 말하는 절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세상의 본질과 다른 본질로 역사하시는 복음의 능력에 동참하는 것이 곧 우리가 누리는 최고의 복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복음의 빛을 드러내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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