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읽은 21절부터는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3장과 4장에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참된 백성은 누구인지,
참된 성도는 누구인지, 성도의 특성과 성격은 무엇인지를 요약했습니다.
왜 이런 주제를 바울이 이야기했겠습니까?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 때문입니다.
(21절)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세상의 모든 약속과 계약에는 기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한이 지나면 효력이 다하는 약속, 효력이 사라지는 계약이 있습니다.
어떤 약속은 더 이상의 의미를 상실한 약속도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은 이미 효력이 다한 율법이라는 약속에 기웃거립니다.
몰라서 하는 행동들입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에서 만나는 바울의 안타까움은
예수를 믿기는 하는데 성도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수 믿는다는 것의 핵심이 무엇인지도 몰라서
율법 주위를 기웃거리며 헤매는 이들을 향한 안타까움입니다.
그들은 율법 아래 머물러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 관계를 유지하려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듣고 잘 안다고 착각하지만,
정작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이들은 율법의 지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율법은 어린아이의 인도자일 뿐입니다. 어린아이가 장성하면 그 인도자는 역할을 마치고 사라집니다.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를 죽을 때까지 지도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입니다.
율법의 의미를 아는 이들은 율법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시선을 향합니다.
22절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절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바울은 율법의 지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우치기 위해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야기를 꺼냅니다. 비유(알레고리)입니다.
바울은 율법이 주는 지배를 이스마엘에, 복음이 주는 자유를 이삭에 비유했습니다.
동일한 아버지이지만 두 아들의 신분은 완전히 다릅니다.
- 하갈은 여종이었기에 이스마엘도 종일 뿐입니다.
- 이삭은 나중에 태어나긴 했지만, 주인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장차 주인이 될 것입니다. 차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를 죄의 종으로 만들 뿐입니다.
종의 자녀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종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는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는 그 아들의 권세를 통해 자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유업을 잇는 상속자로서의 영광까지 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율법의 지배를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25절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26절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여기에서 시내 산이 왜 나옵니까? 그리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란 또 무슨 말입니까?
- 시내 산, 즉 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율법 지키기를 요구하는 유대인의 거주지입니다.
이 예루살렘은 모세가 율법을 수여한 시내 산과 같은 의미를 가지며 율법의 종을 낳는 하갈과 같은 의미입니다.
- 이와 반대 의미를 가지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율법이 아니라 자유를 상속하게 하는 사라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도 성도들이 나아갈 곳은 모세가 율법을 받은 산이 아니라 시온산이며
성도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향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자유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의 곁에서 맴돕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착각합니다.
28절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 우리와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지십니까?
우리야 유대인들처럼 금식하거나 절기를 지키고 할례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눈에 보이는 행위를 통해서 나 자신을 포장하려고 하는,
복음 이외의 것을 통해 나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은
바울에게 질책당한 갈라디아 교인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 그냥 기도하기보다는 금식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들어주실 것 같고,
- 1년 내내 새벽기도 개근을 하시는 분이라면 왠지 더 대단한 분일 것 같은 생각입니다.
- 성경도 몇 독씩 하고 헌금을 더 많이 내는 사람이 신앙도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우리가 대놓고 말하지만 않는다는 뿐인지 모두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은혜를 알고 난 뒤에도 자꾸만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자격과 조건을 갖춰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시도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기독교인데 유교와 샤머니즘에서나 통할 것 같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 심리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왜 이렇게 흔들립니까? 바울이 앞의 3, 4장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누구인지 정체성이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정체성만 분명하다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자녀입니다. 언약의 자녀입니다. 주인의 자녀입니다.
주인의 유산을 상속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것입니다.
29절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우리 내면의 유혹에 이어 외부의 공격도 바울은 언급합니다.
하갈의 자식인 이스마엘이 사라의 자식인 이삭을 괴롭힌 것처럼
율법주의자들은 주인의 자녀, 즉 복음의 자녀들을 핍박합니다.
(왜 이렇게 못살게 굽니까? 왜 남의 마음을 들쑤셔 놓습니까? 자기들도 두렵고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겁먹은 개가 더 크게 짖는다고, 자기 마음에 평안이 없는 사람들은 더욱 주변을 괴롭힙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애초에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이 없는 자들이며 그 나라를 상속받을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복음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나 믿음으로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자유와 함께 주인의 유업을 받게 됩니다.
이미 자유라는 큰 상급을 누리는 중이며 이제 오게 될 하나님 나라의 영광 또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구원과 복을 받으려는 공덕 쌓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생명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은 의무도 아니고 짐도 아닙니다. 선물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자유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만족하시며
기쁨으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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