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앞의 단락에서 아브라함의 두 아들, 종의 자식인 이스마엘과 주인의 자식인 이삭의 예를 들었습니다.
- 어머니가 종이면 그 자식도 결국 종이며
- 어머니가 주인이면 그 자식도 결국 주인의 유산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의 자녀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율법에서 멈추게 되며
믿음으로 주인의 자녀가 되면 주인의 유산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5장 1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종의 멍에는 할례가 상징하는 율법을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멍에일 뿐입니다. 짐일 뿐입니다.
인간에게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인도자일 뿐이지 다다라야 할 목적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행과 구제와 수행과 기도와 종교와 철학과 모든 인간적인 노력의 총체를 율법이라고 해봅시다)
이러한 율법의 행위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율법의 멍에를 벗으면 결과는 ‘자유(를 얻음)’입니다.
이 자유는
- 율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남에게 증명하려는 자기중심적 자아로부터의 자유이며
- 이 세상의 돈과 명예와 사람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 무엇보다도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공로에 힘입어
우리 죄를 덮어주시고 모든 형벌에서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른 신앙을 가지면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자유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않는 삶이 바로 이러한 삶입니다.
2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우리가 다시 율법으로, 과거로 돌아갈 때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어마어마한 은혜의 위력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점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도 좋은데
할례도 받고 율법도 지키고 절기도 지키고 금식도 행해야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을 받은 것처럼
오늘날 우리 많은 성도들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빤하게 알고 있으면서 자꾸 무엇인가를 더 붙들려고 합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더 해야 안전함을 느끼는 그런 것입니다.
나의 공로와 자격과 조건을 더하여 온전한 구원을 이루려는 오류입니다.
이러한 외적인 것을 추구하는 모습은 결국
4절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라는 무서운 끝으로 이어집니다. 왜 그렇게 끊어집니까?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구원으로부터 끊어지고 떨어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마음, 성경의 정신, 구원의 길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렇게까지 무서운 일입니까?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무서운 일이 아니라
율법적인 삶을 사는 동기가 곧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 하나님 뜻이 아니라 내 뜻의 관철에 있기 때문입니다.
(4절)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그들은
신앙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고 수많은 예배를 드리고 엄청난 섬김을 한다 하더라도
그 중심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기보다는
나는 지금 잘 하고 있다. 라는 나 증명의식으로 꽉 차 있는 상태인 셈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서 끊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8절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절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슬며시 들어온 다른 복음, 율법 중심의 복음은 매력적으로 보이고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으니 안도감도 줍니다.
율법을 못 지키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우월감도 느끼게 합니다.
작은 시작처럼 보이지만 율법 중심의 복음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릴 것입니다.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잘못된 신앙에 반해 바른 신앙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5절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성령으로 사는 것이며 /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며 / 의의 소망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1) 성령으로 사는 삶이란 성령의 감동과 인도와 도우심을 힘입는 삶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인도와 도우심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오늘 찬송한 것처럼 ‘이 눈에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더라도’ 즉 외적으로 보이는 증거가 아무 것도 없더라도
내 안에, 내 내면에 성령께서 주시는 증거가 바로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사실 할례의 시작도 내면의 표시 아닙니까? 알몸이 되지 않는 이상 내가 할례를 받았는지 아닌지를 누가 알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할례도 애초에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만 알 수 있는 표시였는데
어느새인가 모든 사람에게 겉으로 드러나도록 요구하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가 아니라면 율법도 우스꽝스러워집니다.)
(2)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데 붙들어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내 노력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 전혀 예수를 안 믿는 것 같은 삶을 사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가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니까 = 다른 것을 더 신뢰하는 것이고
➜ 그 내면의 신뢰는 결국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3)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다 이룬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한계도 있고 모순도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예수가 나의 왕노릇하지 못하는 삶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는 저절로 소망이 생깁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고 인간의 역사가 끝날 때 그 의가 완전히 이루어져서
우리가 의롭다 여김 받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의로운 자에 합당하게 되는 그날입니다.
우리는 의가 완전히 성취될 그 날을 사모하며 이 땅을 살아갑니다.
6절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13절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14절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우리는 지금까지 바른 신앙인으로써 살아가는 삶을 보았습니다.
성령으로 살고 / 믿음을 따라 살고 / 의의 소망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을 한번 더 강조합니다.
이 사람이 눈에 보이는 어떤 삶을 살고 있나(할례냐 무할례냐)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성령께서 주시는 진짜 증거, 산 믿음이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6절에서도 말한 것처럼 믿음은 반드시 사랑으로 역사(役事)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 바로 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으로 사는 삶은 아닙니다. 자기 의는 결국 자기 사랑입니다.
나를 지키고 나를 보전하고 나를 드러내고 나를 증명하겠다는 자기 사랑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분량의 성경 공부와 압도적인 헌신과 헌금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이단이 좋은 예입니다.
그들에게는 사랑도 없고 평안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그들이 율법으로 사는 삶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율법이 아닌 은혜로 말미암는 자유를 누리시고
성령의 위로를 얻으며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자녀, 종의 자녀가 아닌
주인의 유산을 상속받는 자녀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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