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장의 흐름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령으로 살면서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의 삶, (13절)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사람의 삶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다른 이를 내 마음대로 다루고,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내 원하는 대로 하려는 (24절)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정욕과 탐심은 육체의 일입니다. 그 육체의 일의 결말은
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입니다. 영광이라고 쫓아가지만 (26절) 헛된 영광입니다.
세상일이 다 부질없다는 말은 여기까지만 아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러나
(22, 23절)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들의 결말은
8절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가리켜 바울은 1절 신령한 너희는 이라고 말합니다.
(5장과 6장은 별개의 장이 아닙니다. 같은 맥락이 이어집니다.)
이 부분을 원어에서는 ‘영적인, 성령적인’ 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신령이라고 하면 자꾸 무엇인가 특별하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한 신비체험이나 은사체험이 그런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신령은 개인적인 은사나 신비에 국한하지 않고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는지에 따라 드러납니다.
붙임성이 좋다, 인사성이 좋다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성령충만을 알고 싶다면 그의 가족, 그의 친구, 직장, 교회, 주변 이웃들과
그가 어떻게 어울려 살아가는지를 보면 틀림없다는 이야기를 사도의 서신서에서는 못이 박히도록 말합니다.
앞의 5장에서 육체의 일을 따라 살면 열다섯 가지의 이상한 결과물이 나오는 것을 19~21절까지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이 중에 여덟 가지가 관계의 파괴입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 관계가 부서진다는 말입니다.
반면 (5장 22, 23절)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의 회복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6장 1절) 그래서 누군가 죄를 범한 일이 드러나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습니다.
(온유는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마음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는 태생이 그렇지 않은 죄인일 뿐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튼튼하기 때문에 그분의 마음을 깨달아 알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바로잡는데도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뒤탈이 없습니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성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죄인의 공동체입니다. 여전히 사건도 많고 사고도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말이 많은 부정부패, 비리, 추문, 이권 다툼, 분쟁 등 갖가지 이야기들이
세상에는 아예 없는 이야기입니까? 교회만 혼자 이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훨씬 더 심각합니다.
어떤 모임이든 기관이든 단체든 내부와 상부로 가면 갈수록 난장판에 가깝습니다.
(물론 교회가 상대적으로 괜찮으니 괜찮다는 말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만 유독 이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에 요구하는 기준이 높은데
교회가 세상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으니까 욕을 먹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죄가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데 우리 중 죄를 지은 형제자매를 어떻게 대할지는 우리에게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고민하지 않고 원칙대로 처리합니다.“법대로 하자!”는 말은 모든 것을 간단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그러나 참 무서운 말입니다. 법대로 하면 누군가는 잘려나가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모든 일을 법대로 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이냐면
원칙대로 해서 무 자르듯이 잘라 내버리는 것이 교회의 방향이 아니어서입니다.
(세상은 아닙니다. 법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질서가 바로 섭니다. 질서가 바로 서야 더 많은 이들의 생명과 재산이 보호를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은 누가 잘려 나가도 그 누구도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냉정하지만 사실입니다.
성령이 아니라면 자르고 베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쳐내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입니다.
교회는 이 지점에서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교회가 법대로 하고 원칙대로 해서 정의를 바로 세웠다고 칩시다. 그런데 해당하는 사람이 영원히 교회를 떠나버린다면
(세상과 똑같은 잣대로 휘두른다면 반드시 이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는 잘리니 마련이니까요)
그 결과에 대해 잘한 일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의 제일가는 사명은 질서가 아니라 영혼 구원입니다.
그 어떤 가치도 영혼 구원보다 우선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고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은 죄는 멀리하되 (바울은 분명히 ‘바로 잡고’라고 합니다. 눈감고 넘어가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람은 구별해서 살려내야 하는,
마치 테러범은 제압하면서 인질들은 모두 살려야만 하는 초고난도 작전 수행과 같습니다.
법대로 하자는 말은 테러범을 제압해야 하니 인질의 희생을 감수하고 항공기로 폭격하자는 말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간단해지지만 모두가 죽는 수입니다.
어떻게 교회의 일을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려운 일입니다.
사도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의 모습을 계속해서 말합니다.
2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성령의 사람은 짐을 서로 져줍니다. 로마서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롬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것이 세상과 다른 교회공동체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짐을 져서 성취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는 완성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허물도 있고 한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법을 따르고
갈라디아서에서 우리가 배운 것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남을 내 마음대로 하려는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이 우리 공동체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할 때 세상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통달해서 신선처럼 고고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엉망진창 모순투성이인 내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이웃과 나라와 민족을 끌어안기 위해 진흙탕으로 뛰어듭니다. 짐을 집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법, 사랑의 법, 십자가의 법, 결국 생명과 구원으로 나가는 하나님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쯤 되면 여기에서 사도가 말하는 선이 무엇인지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똑같이, 법대로 잘라내는 방법이 아닙니다.
온유함을 가지고 짐을 서로 지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구원의 길이 바로 선입니다.
1차원적으로 생각하는 세상적인 도덕, 착한 일이 선이 아닙니다. 선은 곧 구원입니다.
시편에서도 하나님을 가리켜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을 가리켜 어떻게 감히 착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선하신 하나님은 곧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막 10:18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살며 성령으로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연약한 이들을 바로 잡아주고
주님의 계명을 완성함으로써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번호 | 제목 | 설교자 | 등록일 | 조회수 | 첨부 파일 |
---|---|---|---|---|---|
2676 | [6월 5일] 하나님은 작은일에도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왕하 6:1-13) | 최종운 | 2025-06-04 | 2 | |
2675 | [6월 4일]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엡 1:1-14) | 손병호 | 2025-06-04 | 3 | |
2674 | [6월 3일]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 6:11-18) | 손병호 | 2025-06-03 | 5 | |
2673 | [6월 2일]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갈 6:1-10) | 손병호 | 2025-06-02 | 7 | |
2672 | [5월 31일] 하나님은 수단이 아닙니다. (왕하 5:15-27) | 최종운 | 2025-05-30 | 10 | |
2671 | [5월 30일] 나병,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콜링 (왕하 5:1-14) | 최종운 | 2025-05-29 | 9 | |
2670 | [5월 29일] 순종이 기적의 문을 엽니다. (왕하 4:38-44) | 최종운 | 2025-05-28 | 11 | |
2669 | [5월 28일] 오직 성령의 열매는 (갈 5:16-26) | 손병호 | 2025-05-28 | 12 | |
2668 | [5월 27일]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갈 5:2-15) | 손병호 | 2025-05-27 | 12 | |
2667 | [5월 26일]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갈 4:21-5:1) | 손병호 | 2025-05-26 | 12 | |
2666 | [5월 24일] 하나님은 아직 끝이 아니십니다. (왕하 4:17-37) | 최종운 | 2025-05-23 | 15 | |
2665 | [5월 23일] 과부와 수넴여인, 두 여인이 받은 축복 (왕하 4:1-16) | 최종운 | 2025-05-22 | 16 | |
2664 | [5월 22일]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하나님 (왕하 3:13-27) | 최종운 | 2025-05-21 | 19 | |
2663 | [5월 21일] 유업을 잇는 자들 (갈 4:1-20) | 전소리 | 2025-05-21 | 22 | |
2662 | [5월 20일] 언약과 율법 (갈 3:15-29) | 전소리 | 2025-05-20 | 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