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이야기에서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나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 엘리사의 말씀에 따라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고,
깨끗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나병의 치유 이후에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남부럽지 않은 모든 것을 가진자도, 내 인생에 숨기고 싶은 문제, 약점, 결핍, 영적인 나병
이것은 하나님앞에 나오라는 콜링, 초청이다.
나아만, 그는 하나님앞에 나왔다.
병이 나은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치유받은 나아만은 곧장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엘리사에게 다시 찾아와 감사와 신앙고백을 드립니다.
그가 한 말은 이렇습니다.
“이제 온 천하에 이스라엘 외에는 하나님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15절)
그는 이제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그의 내면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나아만은 돌아가는 길에 특이한 부탁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흙을 노새 두 마리에 실어 가겠다.” (17절)
왜 그랬을까요? 그는 고국 아람에서도 여호와 하나님만 예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람에는 성전이 없지 않습니까?
당시 관습상 특정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그 신의 땅에서 가져온 흙 위에서 예배를 드리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흙을 예배의 장소로 삼아,
이제부터는 오직 여호와 앞에 무릎 꿇겠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나아만은 마지막으로 양심의 고백을 합니다.
“제가 아람 왕을 보필하는 자로서 림몬 신전에서 어쩔 수 없이 몸을 굽히게 될 텐데,
그 일이 제 양심에 걸립니다. 주여, 이 죄를 사해 주옵소서.”
그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현실과 신앙 사이에서의 갈등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려는 그의 진실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이방인 나아만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자
그의 중심, 그의 태도, 그의 양심, 작은 행동까지 모두 바뀌었습니다.
엘리사는 그에게 “평안히 가라” 하며 축복합니다.
그부분은 걱정하지 말고 아람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왜? 엘리사는 그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찬가지다.
완벽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없다. 하나님도 우리가 완벽하지 않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중심의 진실함을 원하신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다른곳을 향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분에게 향하는 진실함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의 태도, 우리의 언어, 우리의 양심, 우리의 행동까지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이제 이야기의 시선이 엘리사의 종 게하시로 옮겨집니다.
나아만은 감사한 마음으로 엘리사에게 예물을 드리려 하지만,
엘리사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이 병은 하나님이 낫게하신 것이지 자기가 한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은혜는 값으로 거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아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값’을 받게 되면,
그 치유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것이 아니라,
엘리사 사람의 능력이나, 사람의 기술이 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철저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달랐다.
나아만이 떠난 뒤에 마음속에 탐욕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저 많은 예물 중 하나도 안 받다니, 너무 아깝다!”
그리고 그는 뒤쫒아가서 나아만에게 거짓말을 한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하며, 거짓을 실행합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가 나아만의 재물이 욕심이 나면, 죄송한데 나는 좀 몇 개 달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되지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것.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욕심의 수단으로 삼은 신앙은, 결국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자신의 사심을 채우고자 하는 사역자들이 있다.
성경은 그들을 “삯군”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목회자”들이 늘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할 일들입니다.
게하시는 나아만을 쫓아가
“엘리사가 제자를 위해 달란트 하나와 옷 두 벌을 요청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나아만은 의심 없이 두 달란트를 줍니다.
게하시는 그것을 몰래 집에 숨깁니다.
게하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엘리사 앞에 섭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이 너와 함께 가지 않았느냐?” (26절)
그리고 이어 말합니다.
“지금이 어찌 은과 의복을 받을 때냐? 포도원과 양 떼와 남종과 여종까지 탐하느냐?”
게하시의 탐욕은 단지 그 금은뿐만 아니라 끝없는 소유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결국 엘리사는 나아만에게서 떠난 나병이 게하시와 그 자손에게 옮겨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게하시는 그 자리에서 피부가 눈처럼 희게 되어 나병에 걸립니다.
여러분,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이방인 나아만은 치유받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고,
하나님을 섬겼던 이스라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의 종인 게하시는 심판받아 병에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두 사람의 길이 갈립니다.
- 나아만은 그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은혜를 진심으로 받았고,
그 은혜를 삶으로 옮겼습니다.
그의 인생은 치유를 받고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는 은혜를 받았다.
- 반면, 하나님의 일꾼이었던 게하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수단 삼아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나는 지금 은혜 앞에서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내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은혜는 값으로 살 수 없고, 어떤 업적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감사로, 순종으로 받는 것입니다.
은혜는 누리는 것이지,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 회복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하나님앞에 겸손하게 순종함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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