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와 나라의 갈 길을 알게 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린도후서는 기록되기 전까지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때, 즉 첫 번째 편지를 쓸 때는
두 번째 편지까지 쓰려고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들어온 질문에 대한 어느 정도의 대답은 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첫 번째 편지, 우리가 알고 있는 고린도전서가 발송되고 난 후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한 통 더 써서 디도에게 배달을 부탁합니다.
(성경의 한 권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 편지의 존재는 고린도후서 2:4와 7:8에 나옵니다.
아마 성경의 한 권이 되었다면 그 편지가 고린도 2서가 되고
우리가 아는 고린도후서는 고린도 3서가 되었을 것입니다. (마치 요한 1,2,3서처럼)
이후 디도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자 바울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직접 길을 떠나고 마케도니아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아마 디도가 에베소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이에 고린도 교회의 상황도 다시 업데이트되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다시 고린도에 보내는 세 번째 편지를 보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의 고린도후서로 알고 있는 책입니다.
(이 모든 일은 아마 1년 안에 일어나지 않았을까 많은 성경학자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여곡절만 봐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얼마나 애정을 쏟아부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23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2:1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그러나 바울은 끝내 다시 고린도에 가지는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 방문이 바울과 교인들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동기가 사소한 인간적인 마음, 서운함이나 토라짐이 아님을 분명하게 하려고
1:23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하나님까지 증인으로 부를 정도입니다.
여전히 교회에 문제가 많고
- 바울의 자문과 도움, 방문까지 요청하는 교인들도 있었지만
- 분명한 것은 바울을 반대하는 교인들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2:3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바울의 방문이 환영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의 갈등을 증폭시킬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예 포기합니다.
바울의 목적은 교회에 무슨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1:24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협력자가 되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미 믿음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당신들은 내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끌고 가겠습니다.’라고 하는 은밀한 주인의식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 브레이크 없는 고집 때문에 가정이 망가집니다. 교회가 망가집니다.
나라와 민족까지도 망가지는 것을 우리가 모두 보고 있지 않습니까?
누구 한쪽만 포기하면 될 텐데 나는 선이고 상대는 악이니까 반드시 내가 이겨야 한다.
나는 알고 있고 상대는 모르니까 내가 너를 지도해야 한다. 내가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서로 고집부리면 결과는 양쪽 다 파멸일 뿐입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선하신 하나님은 왜 악으로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아들이 죽도록 내버려 두셨을까요?
어떤 신학자는 예수의 십자가는 자살에 가깝다는 과격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만
십자가는 엄밀히 이야기해서 자발적인 죽음 아닙니까?
예수님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내가 선이고 세상이 악인데 내가 이겨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왜 내가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포기하니까, 내려놓으니까, 내가 죽으니까, 구원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진리가 우리의 눈에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내려놓음입니다.
무슨 사역을 그만두고, 직분을 그만둘 때 그럴듯하게 ‘내려놓는다’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려놓음은 철저한 자기 손해를 전제로 하는 단어입니다.
그만두어서 내가 손해 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내려놓음입니까?
그 내려놓음을 통해서 교회가 고민하고 사역이 더뎌질 뿐 나는 무슨 손해를 봅니까?
내려놓음의 최고봉인 십자가와 내가 말하는 내려놓음은 무슨 공통점이 있습니까?
이쯤 되면 비교하기도 민망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교회의 주관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라는 자기의 신앙을 자기의 선택으로 고백합니다.
신앙고백은 주일예배 때 외우는 사도신경이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일주일 내내 내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에 잠깐 와서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사교(邪敎)의 주문(呪文)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신앙고백은 내 삶이고 내 선택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선택으로 자기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주관자이시고 나머지는 모두 동역자일 뿐이라는 그의 믿음입니다.
바울의 이 마음은 용서의 결단으로 이어집니다.
2: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7 너희는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8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아마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울의 대적자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놀랍게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 먼저 이야기합니다.
교인들 사이에서도 그 대적자를 향해
바울에게 그렇게 대하다니 무례하다. 너무하다. 비난하는 소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 같으면 누가 내 편을 들어주면서 내 대적자를 비난하니
겉으로 티는 안 내더라도 잘한다. 잘한다. 속으로 좋아하며 은근히 부추겼을 것인데
바울은 정반대의 선택을 합니다. 그를 용서하라. 그를 위로하라.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라.
2: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사탄은 분열과 다툼을 통해 자기의 왕국을 확장합니다.
결국 교회가 분열하는 것은 사탄에게 좋은 먹잇감을 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바울은 위의 6절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일정 기간 벌을 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책망의 목적이 죄 회개이지, 사람 징벌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나라는 어떻습니까? 공동체가 바른길로 가야 한다는 처음의 목적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죽음의 언어만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외치는 정의가 무엇입니까? 상대방의 전멸입니다. 반대하는 소리가 다 사라진 만장일치,
오직 하나의 의견으로 통일된 단합된 공동체가 지상에 딱 하나 있습니다. 북한입니다.
우리는 대체 지금 어디를 지향하고 있습니까?)
설령 내가 하는 조치가 아무리 옳고 바른 것이라 하더라도
한 사람을 구원에서 떨어지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가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면서까지 바로 잡아야 할 질서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왜 교회입니까? 영혼 구원하자고 교회로 모이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영혼 구원의 가치를 버리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입니까?
뒤에서 좋다고 깔깔대고 웃고 손뼉 치는 마귀가 보여야 합니다.
용서는 최고의 복수입니다. 강력한 무기입니다.
사단의 계책을 물리치고 공동체를 하나가 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주여, 오늘도 용서하게 하소서. 나를 내려놓게 하소서. 그리해서 하나님의 뜻, 구원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기도함으로 응답받는 저와 여러분의 오늘 하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번호 | 제목 | 설교자 | 등록일 | 조회수 | 첨부 파일 |
---|---|---|---|---|---|
2622 | [4월 3일]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왕상 20:22-34) | 최종운 | 2025-04-02 | 3 | |
2621 | [4월 2일]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고후 3:1-18) | 손병호 | 2025-04-02 | 8 | |
2620 | [4월 1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2:12-17) | 손병호 | 2025-04-01 | 7 | |
2619 | [3월 31일] 너희는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고후 2:5-11) | 손병호 | 2025-03-31 | 8 | |
2618 | [3월 29일] 하나님은 숫자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왕상 20:13-21) | 최종운 | 2025-03-28 | 11 | |
2617 | [3월 28일] 아람과 이스라엘의 싸움 (왕상 20:1-12) | 최종운 | 2025-03-27 | 8 | |
2616 | [3월 27일] 사명의 길로 돌아가는 엘리야 (왕상 19:15-21) | 최종운 | 2025-03-26 | 11 | |
2615 | [3월 26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악을 이기는 교회 (고후 1:12-2:4) | 전소리 | 2025-03-26 | 10 | |
2614 | [3월 25일] 교회, 하나님의 공동체 (고후 1:1-11) | 전소리 | 2025-03-25 | 14 | |
2613 | [3월 24일] 주님처럼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 (고전 16:1-24) | 전소리 | 2025-03-24 | 14 | |
2612 | [3월 22일] 세미한 소리로 찾아오시는 하나님 (왕상 19:9-14) | 최종운 | 2025-03-21 | 18 | |
2611 | [3월 21일] 엘리야를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 (왕상 19:5-10) | 최종운 | 2025-03-20 | 16 | |
2610 | [3월 20일] 영적 침체에 빠지는 이유 (왕상 19:1-8) | 최종운 | 2025-03-19 | 19 | |
2609 | [3월 19일] 죽은 자들이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고전 15:35-58) | 손병호 | 2025-03-18 | 19 | |
2608 | [3월 18일]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12-34) | 손병호 | 2025-03-18 | 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