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세상이 아니라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12절)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 당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자들은 교회 안에서도 득세했습니다.
신약의 수많은 서신서를 보면 사도들과 교회들이 얼마나 영지주의자들과 힘든 씨름을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철학이었다는 말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혼은 선하고 순수한 것으로 여기고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은 악하고 타락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초자연적인, 영적 지식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지(靈智)주의자들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否認)했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것이 악하고 타락하고 천박한 것인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냄새나는 인간의 몸을 입으실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현설을 주장했습니다. 주님께서 실제로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형태로, 오늘날의 입체영상 같은 개념으로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철학과 종교가 결합한, 얼핏 들으면 참 그럴듯해 보이는 이야기인데
영지주의자들 때문에 초대교회는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이것이 왜 문제일까요?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도 아니라면
육체가 어차피 없는데 죽을 일도 없고 죽지를 않았는데 부활도 헛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활도 헛것인데 믿음은 무슨 소용입니까?
이렇게 되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믿고 있는단 말입니까? 허상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까?
바울은 오늘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2,000년이 지난 우리는 영지주의 이단이라고 하니까
오래전 그리스 – 로마 철학의 영향을 받은 구시대의 이단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늘날에도 현대판 영지주의, 혹은 현대판 영지주의자들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를 통한 악한 영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당시 영지주의자의 철학은 희한한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1) 영혼은 선하고 순수하고 육체는 악하고 타락한 것이니
(2) 우리는 오직 영적인 지식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고
(3) 그래서 결론이 둘 중 하나입니다.
- 타락한 육체를 어떻게 해서든 억누르고 죽여서 구원으로 가자는 극단적 금욕주의,
- 혹은 어차피 육체는 썩어 없어지고 영혼만 영원히 남을 테니 (32절) 먹고 마시자!
이 버려질 육체로는 마음껏 쾌락을 즐기자는 극단적 쾌락주의입니다.
이 이야기가 2,000년 전에 끝난 것 같습니까? 교회와 세상을 둘러보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는 극단적 금욕주의자들이 난무합니다. 내 안에 있는 율법주의를 보십시오.
뭔가 일을 해야만 하고, 헌금을 해야만 하고, 얼마나 많은 강박에 쫓기고 있습니까?
게다가 한국교회의 분위기가 (개인의 의지도 있겠지만 사람이 사정인 것이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못하는 교인에게는 아예 자리를 내주지 않습니다.
만약 능력치나 공로만 따져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다면 감히 누가 주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능력이 있어서 제자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제자로 세우시니 그들에게 능력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금욕주의, 율법주의 안에 부활이 주는 기쁨과 참 생명은 없습니다.
세상에는 극단적 쾌락주의자들이 우글거립니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인데 실컷 먹고 마시고 놀다가 죽자는 식입니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이제는 어르신들도 놀러 다니면서 소일하는 것이 일과입니다.
예전에는 자수성가라는 개념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한 세상이 되자 더욱 자포자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저축이나 절약의 개념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지금 예배드리고 힘들여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해서 하나님의 때에 열매를 맺는다?
이런 기다림 자체가 사치입니다. 짧은 동영상과 빠르고 자극적인 매체에 깊이 빠진 세대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 뿐입니다.
오늘 재미난 일이 있으면 그리로 가는, 영적 쾌락주의자들입니다.
여기에 부활이 주는 기쁨과 생명이 끼어들어 갈 틈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져야지만 부활도 있는 것인데 조금이라도 내 손해 보는 것을 못 견뎌서 안달인,
십자가를 내팽개치려고만 하는 세대에게 무슨 부활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영지주의가 참 무서운 것이
지식을 통한 구원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삶으로의 적용이 너무나 약하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이단을 보십시오.
얼마나 성경 공부를 많이 합니까? 온갖 설교와 강의와 비유가 난무하지만,
이단이 지역사회 봉사한다는 이야기 들어봤습니까? 빈자 구제한다는 이야기 들어봤습니까?
심지어 그들은 잘 훈련된(?) 교인들 덕분에 헌금도 상상을 초월하지만
오로지 성경 공부, 오로지 공격적인 전도, 그들의 교세를 확장하는 일에만 골몰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 지식, 그리고 지식을 통해 드러나는 자기 의(義)입니다.
여기에는 은혜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자기 의(義)만 우글거리는 철저한 인간의 집단일 뿐입니다.
이단만 뭐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특히 우리 장로교는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잘 물려받아서 착실하게 공부 열심히 하는 분위기가 잘 잡혀 있습니다.
많은 설교를 듣습니다. 많은 성경 공부에 참여하고, 얼마나 많은 특강을 듣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의 교인들만큼 공부 열심히 하고 말씀을 많이 아는 교인들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머리는 큰데 삶으로는 하나도 연결이 되지 않는
영지주의자, 이단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 구원에 이르는 영적 지식을 사모하면서 금욕주의자가 되어서 세상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자발적 고립을 선택합니다.
이러면 내 모습을 보면서 누가 교회 올 생각을 하겠습니까?
-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구원은 똑같이 받을 것이라면서
주일에 잠시 교회 나와서 나름 예배드린다고 1, 2시간 졸다가 가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것이 영적 영지주의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런 영적 영지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헛되다, 영혼만이 참되다고 냉소하는 영지주의자들을 향해 바울은 선포합니다.
(20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가리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합니다.
열매입니다. 실제로 온 것은 아닌데 온 것처럼 보인다는 영지주의자들의 ‘허상’ 개념이나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부활은 실제 열매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무슨 향만 맡고 만족하거나 눈으로 보고 좋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손에 잡고 한입 가득 베어 물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실재(實在)입니다.
(18, 20절) 바울은 죽음을 가리켜서 ‘잠잔다.’라고, 말합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다시 깨어난다는 기대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오늘 밤에 이대로 죽겠다고 생각하며 잠을 자는 황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히 내일 아침에 일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삶, 실재에 대한 당연한 기대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허상이 아닙니다.
구원의 열매는 부활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보면서 나무 전체를 알게 되듯이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구원에서 부활은 선택이 아닙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요소가 아닙니다.
반드시 부활이 있어야지만 구원도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구원의 시작이며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성도의 삶을 깨어있게 합니다. 열매입니다. 실재입니다.
허깨비가 끌고 다니는 것 같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삶을 살지 않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34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부활을 믿는 사람의 삶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의 삶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귀한 깨달음의 은혜가,
그리고 그 은혜가 주는 하늘의 능력과 권세가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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