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변수1 | 2022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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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변수1 | 오덕호 |
확장변수1 | 누가복음 23:26-32 |
확장변수1 | https://www.youtube.com/watch?v=JqwEDTl9zis |
309. 십자가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염려해주시는 예수님
(눅 23:26-32; 찬송: 85장. 2022. 7. 14[목]. 새벽기도회)
오늘도 아침 첫 시간을 주님께 바치며 새벽기도회로 모인 모든 성도님들 가정과 주님께서 세우신 서울산정현교회 위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너무 힘들어하셔서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됩니다. 이렇게 끌려가시는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따라옵니다. 본문 27절입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것은 죽음에 대해 애곡하는 모습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며 애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과 애곡하는 여인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이 여인들과 백성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백성에 대해 생각해보면, 조금 전에 절대다수의 백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백성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성은 당시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구경하려는 호기심으로 따른 것 같습니다.
백성 중에는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셨을 때 엘리야를 부른다고 하기도 하고, 엘리야가 와서 구해주나 보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습니까? 마가복음 15:35-36입니다.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여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예수님을 위해 애곡한 모습을 보면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른 사람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들을 예루살렘의 딸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제자보다 일반 유대인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애곡하며 예수님을 따른 여인들은 예수님께 호의를 가지고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기는 했지만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애곡한 여인들의 다수는 인간적으로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고 진짜 예수님의 여 제자들은 소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애곡하는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28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고통 속에 있는 예수님이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이 겪게 될 슬픔과 고통을 예언해주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일차적으로 지금 예수님을 위해 우는 여인들을 가리킵니다. 아울러 이 말은 유대 민족 전체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스바냐 3:14입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기서 “시온의 딸,”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딸”은 모두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유대 백성에게 주시는 경고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자신을 위해 우는 여인들을 염려하시고 유대민족을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보다 여인들과 유대민족이 당할 고난이 더 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당할 고난이 얼마나 클지 세 가지 표현으로 알려주십니다. 첫째,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자녀생산과 양육이 축복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때에는 축복이 아니라 큰 화가 됩니다. 자녀들의 고통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만날 고난이 너무 커서 자녀가 있는 축복보다 자녀가 없는 축복이 더 크게 느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앙이 극심하다는 것을 묘사할 때 많이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고난이 너무나 심해서 사람들은 차라리 산에 깔려서 그 고난을 피하고 싶을 정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한다면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푸른 나무는 산 나무이고 마른 나무는 죽은 나무입니다. 예수님은 푸른 나무를 자신에 비유하고, 마른 나무를 유대민족에 비유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 나무와 같은 예수님이 이런 고난을 당하신다면 죽은 나무와 같은 유대민족은 얼마나 큰 고난을 당하겠느냐는 뜻입니다.
유대민족이 당할 고난이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보다 더 큰 것은 두 가지 모습 때문입니다. 하나는 이들이 당하는 고통 자체가 그렇게 크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고난은 영광을 이루는 것이지만 그들의 고난은 파멸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은 다른 두 행악자도 함께 끌려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행악자는 강도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강도는 독립운동가에게도 쓰인 단어여서 독립운동가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지만 행악자는 철저히 악을 행한 죄인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악한 자들과 함께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철저히 죄인으로 죽으신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정말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이 불법자와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는 예언이 성취되는 모습입니다. 이런 고난의 예수님이 성경이 예언한 진짜 메시야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항상 예수님을 믿고 섬길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버리면 예수님의 고난보다 더 큰 고난과 파멸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믿음을 버리지 않기 바랍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모르는 이웃이 예수님을 믿도록 도와서 우리 모두가 함께 구원의 길을 가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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