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변수1 | 20220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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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변수1 | 박현덕 |
확장변수1 | 고후 11:1-6 |
확장변수1 | https://www.youtube.com/watch?v=0gyqlHEqeJc |
45. 구원의 길을 가려면 바른 말씀의 지식을 들어야 합니다
(고후 11:1-6 찬송 287장. 2022.7.7(목)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지만 믿기 시작했으면 이제는 믿음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이 과거의 일이면 안 됩니다. 나도 한때 믿음생활을 했다는 것은 지금 전혀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요? 중요한 것은 지금 믿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나의 믿음을 뒤흔드는 유혹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혹에 넘어가서 신앙의 자리에서 떠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비록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잘못된 믿음을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신앙의 자리를 떠나있으면 적어도 나는 믿음이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잘못된 믿음생활을 하는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 사람들은 자신이 믿음이 없다고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성도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결론은 어떨까요? 믿지 않는 사람이나, 잘못 믿는 사람이나 결과는 같습니다.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믿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상당히 격양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 때문에 성도들이 거짓된 복음에 휘둘려서 구원이 자리에서 멀어지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만 아니라 갈라디아지역 교회 성도들도 잘못된 진리를 전하는 자들과 그들에게 현혹된 자들 때문에 크게 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따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6-10).”
어떻습니까? 정말 바울의 격양된 어조를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이 이렇게 강하게 책망한 이유가 뭐였습니까?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그런 자들의 말에 속아서 그릇된 복음을 따르는 자들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도 격양된 어조로 말한 것도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진리는 절대로 타협하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복음의 진리를 타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도대체 세상 어느 누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함부로 변경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그 무엇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른 예수님으로 소개할 수 있나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함께 교회학교 교사로 섬겼던 다른 청년이 이단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단에 빠진 청년이 교회 관계자 몰래 학생들을 모아서 그릇된 신앙교육을 하다가 발각이 된 겁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은 청년의 교사직을 박탈하고 출교까지 시켰습니다. 이걸 본 청년은 교회가 너무 하지 않나 싶어서 담임목사님에게 상담을 청했습니다. 이단에 빠진 청년이 잘못한 건 맞지만 그래도 교회가 그를 사랑으로 품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이건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라면서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이처럼 강경한 목사님의 태도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사랑이 없나? 이렇게 포용력이 약한가?”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청년이 목회의 뜻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로 살아가면서 그때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것을 알고 반성했습니다. 사랑과 포용으로 접근해야 부분이 있고, 단호하게 맞서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안 겁니다. 교회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품어주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진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신앙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포용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출교시켜서라도 진리를 바로 세우는 게 맞는 겁니다.
우리는 진리를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려는 사탄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뱀이 하와를 유혹해서 하와가 하나님의 뜻을 어긴 것처럼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거짓 사도들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어서 구원에서 멀어질까 봐 걱정이 컸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교회에 거짓 사도들이 들어와서 우리가 전하지 않았던 다른 예수를 전해도 잘 받아들인다며 한탄했던 겁니다.
거짓 사도들은 바울을 믿을 수 없고 별로 영적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면서 자신들이 가르치는 게 맞다고 성도들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고린도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거짓 사도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 버리는 일부 성도들을 보면서 바울은 큰 충격을 받았던 겁니다. 정말 인간적으로 보면 힘이 빠지는 일이 벌어진 거죠.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자기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야만 거짓 사도의 유혹에 넘어간 교인들이 다시 바울이 전한 복음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고후 11:5).”
그런 다음 그가 고린도 지역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밝힙니다.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고후 11:6).”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의 편지는 힘이 있지만, 직접 말을 들어보면 말주변도 없고, 힘도 약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나는 그들 주장대로 말은 능하지 못할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전한 지식만은 올바르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지식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자식, 즉 복음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는 내 말이 설령 어눌하게 들릴지라도 내가 당신들에게 전한 지식만은 결코 거짓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설교를 들을 때 무엇을 중요한 기준으로 보십니까? 얼마나 설교자가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가? 얼마나 웅변 실력이 뛰어난가? 얼마나 감동 있고 재밌게 말을 잘하는가? 이런 것을 보십니까? 아니면 바른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가를 보십니까?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합니까? 설교자의 겉입니까? 아니면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의 내용입니까? 사람의 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입니까? 우리에게는 정말 무엇이 필요합니까?
우리에겐 오직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말씀이 감동적이고 호소력이 있어도 말씀의 내용이 그릇되어 있으면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신앙이 왜곡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성경에서 전하는 진리이면서 동시에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까? 당시 교회가 말씀을 왜곡되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신앙이 엉망이 되었고 교회가 타락한 겁니다. 따라서 종교개혁가들이 외친 개혁의 3대 정신이 뭐였습니까?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였습니다.
우리 사회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정보가 넘쳐나는지 모릅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 보면 여러 정보가 뜹니다. 문제는 그중에서 어떤 게 사실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실과 거짓 정보를 잘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정보에 놀아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회 외에도 기독교방송이나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서 얼마나 다양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설교자들이라면 말씀을 바르게 전하려고 힘쓸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모든 설교자의 메시지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자칫하면 혼동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들으려 하지 말고 비록 좀 불편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구원의 길을 가기 위해서 기꺼이 쓰디쓴 하나님이 말씀을 받아먹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바른 신앙지식은 사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즉 바른 신앙지식은 하나님과 더 친밀하게 하며, 예수님만이 구원자시라는 진리를 더 강하게 붙들게 하고, 성품을 변화시키며 교회를 하나 되게 합니다. 선교의 열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하며 섬겼을 때는 이런 변화가 그들 안에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며 바른 지식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그에게 복음을 듣고 믿음의 삶을 사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잘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릇된 신앙지식이 고린도교회를 또다시 병들게 할까 봐 염려가 컸던 겁니다. 본문은 바울의 이런 심정이 녹아 있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의 길을 가려면 바른 지식이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그릇된 신앙생활을 안 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말의 형식이 아니라, 말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목회자들의 쇼를 보려고 모인 관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진리 안에서 구원의 길을 가려고 말씀을 듣는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의 바른 진리의 말씀이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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