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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판단기준이어야 합니다(고후 10:7-12)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판단기준이어야 합니다(고후 10:7-12)
2022-06-28 05:35:15
박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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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변수1 20220628
확장변수1 박현덕
확장변수1 고후 10:7-12
확장변수1 https://www.youtube.com/watch?v=q2McvIZVIi0

42.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판단기준이어야 합니다

(고후 10:7-12 찬송 484. 2022.6.28()

 

사람은 나름 자기 생각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기준을 가지고 자신이나 이웃, 세상을 보고 판단합니다. 이런 기준이 세워지는 것은 보통 살았던 환경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태어난 나라나 가정, 내가 자라면서 접하게 된 시대적 배경, 주로 살았던 지역의 분위기, 영향을 받은 사람이나 배운 지식 등, 여러 경험을 통해 자기 생각의 기준이 세워집니다. 이렇게 기준이 세워지면 그 틀을 깨고 새로운 사고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의 사고를 반성하며 잘못된 부분은 기꺼이 내려놓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말 끊임없이 성장하고 성숙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학문 분야도 보면 자신이 이전까지 주장한 이론을 스스로 부정하고 완전히 새로운 지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과 세계를 성찰하며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론에 큰 오류가 있음을 기꺼이 인정하고, 다시 교정하는 용기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학자들을 연구하는 후대 사람들은 그 학자의 학문적 성과를 전기와 후기로 나눠서 전후기의 연속성과 차이점을 논하며 지혜를 얻곤 합니다. 반면에 자기 생각의 기준이 너무 강한 나머지, 뭔가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울을 대적했던 세력도 이 점에서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확실한 진리의 기준에 근거하여 판단하며 교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평가기준은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평가하며 자기들끼리 서로 비교했던 겁니다. “나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지켜봤다. 예수님처럼 유대인 출신이다. 또한 구약성경을 잘 안다. 나는 이름있는 분의 추천서를 가지고 있다. 나는 영적인 능력이 있다. 이적을 행한 일이 있고, 방언을 할 줄 안다. 말씀을 힘 있게 잘 전한다는 등 그들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면서 자신들이야 말로 능력있는 참된 사도라고 믿었고, 이걸 성도들에게 주장했던 겁니다.

 

또한 그들 자체의 기준으로 바울을 평가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메시지를 통해서 그들이 바울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고후 10:9-11).” 이처럼 그들은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정말 글에 권위가 있지만, 막상 만나 보면 영적인 힘도 별로 안 느껴지고 말주변도 없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성도들을 온유하고 포용적으로 대했던 것을 무능한 이미지로 덧씌워 버렸던 겁니다.

 

이런 주장이 일부 성도들에게 먹혔던 이유는 당시 이방사회에서는 수사학적 언변으로 청중을 잘 설득하는 사람을 높여주고 존중하는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여간 말을 잘해서 청중을 잘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대접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고 화려한 미사여구를 구사하면서 청중을 웃기고 울리거나, 독특한 목소리로 튀게 보여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상한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렇게 전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이처럼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외형적인 게 아니라 진리였습니다. 자기 권세와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하기도 하고, 당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말도 인용하곤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는 건물을 짓는 것을 비유를 사용해서 권세의 본질을 전했습니다.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후 10:8).” 이처럼 그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는 건물을 세우라고 주신 것이지 무너뜨리라고 주신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권세는 성도들의 신앙과 교회를 잘 세우라고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그는 건축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과 세상적인 웅변술이나 세상 지혜가 서로 뒤섞이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웅변술과 세상 지혜가 전혀 쓸모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역자의 웅변술이나 그의 세상적인 지식이나 지혜가 더 드러나서 오히려 그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가 가려지면 안 되기 때문에 극히 조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바울은 당시 사람들이 연설했던 방식과는 다르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적인 위로나 감동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개척했을 때나, 교회와 떨어져서 편지로 써야 했을 때나, 또 교회에 직접 방문해서 성도들을 대할 때나 그의 마음 중심은 한결같았습니다. 그의 목표는 성도들과 교회가 복음 안에서 든든히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바울은 왜 대적자들이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지고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으며, 성도들도 그들 말에 현혹될 수 밖에 없는지 밝혔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 10:12).” 이처럼 바울을 대적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세력들은 자신들의 평가기준을 자기로 삼았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기준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재고 자신들이 세운 기준에다 자기를 견주어 보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평가 기준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사람의 외형을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저 사람이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 분별하려면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로 성도들과 교회의 신앙을 세우려고 하는지 무너뜨리려고 하는지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목회자를 포함하여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우리도 목회자를 모시거나 교회에서 중직자를 세울 때 나름대로 생각하는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게 됩니다. 문제는 내 판단 기준 자체가 잘못되어 있으면, 절대 바른 판단을 할 수 없을뿐더러, 바른 사람들을 세우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한국교회가 목회자에 대한 판단기준이 그릇되어 있으면 바른 목회자와 함께 교회를 섬길 수 없고, 목회자도 인간인지라, 세상적인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중직자를 세울 때도 신앙이 최우선이 아니라, 얼마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느냐, 얼마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으냐, 누구 집안이냐에 따라 세워진다면, 교회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요? 머리로는 그리스도가 삶의 척도이며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고, 사람을 세울 때 기준이라고 해도, 실상은 우리 스스로가 세워놓은 기준으로 교회 직분자를 세운다면, 이것은 판단기준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떨어져서 편지를 쓰는 말씀이나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 하는 일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환경이나 여건이 다르고, 또 사람들도 다른데 어떻게 아무 차이가 없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모든 것의 척도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대적자들이 비난했던 대로 바울은 편지에서는 상당히 강력한 표현으로 말씀을 전한 반면, 성도들과 직접 대할 때는 약해 보이고 말이 시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도 완전한 사람이 아닌 이상, 상대적으로 부족한 점은 있을 수 있죠. 그러나 바울의 사역을 알려주는 사도행전이나, 그의 서신을 토대로 그의 사역을 들여다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칠 때는 목양적인 면에 훨씬 더 관심을 가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회자도 말씀을 전할 때는 하나님 말씀을 원칙적으로 전하다 보니 내용이 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님들과 함께 일을 하거나 가르칠 때는 온화함과 관대함으로 대해야 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럼 말씀을 전할 때나 성도를 대할 때나 마음 중심이 다르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말씀을 전할 때는 담대하게 해도 성도님을 대할 때는 그분들에게 인간적으로 잘 보이기 위해 굽신거리거나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못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면,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 어떤 때는 강하게, 어떻게든 부드럽고 온화하게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그릇된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고,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한 번 안 좋은 인식이 머리에 깊이 각인되면 그것으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판단기준을 나로 둬서는 안 됩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두는 것도 위험하고, 조심스럽긴 해도 맹목적으로 교회전통을 판단기준에 두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판단기준은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언제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정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복종시켜야 합니다. 또한 성령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삶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와 형편 가운데 있더라도, 그리스도가 판단의 척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가 바른 판단을 하게 이끄실 것이며, 우리를 선할 길로 인도하셔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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