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섯째 날을 시작합니다.
26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장의 ‘우리’라는 표현은 여러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떤 학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화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신학계에서는 더 이상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개념이 아예 없던, 오로지 유일신 하나님만 강조하던 구약시대에
(예수와 사도시대, 초대교회의 시대를 지나서야 겨우 정립이 된 개념인) 삼위일체를 전제한 내용을
(초대교회 시대를 기준으로 해도 2천 년이나 전에 있었을, 그리고 오늘날 기준으로는 3천 년 전입니다.)
창세기의 저자가 썼다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라는 주장이 훨씬 근거도 많고 신빙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다가 문맥상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는
보통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같은 단어가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찾아보면 어느 정도 실마리가 풀립니다.
구약성경의 이사야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 6:8)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고민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의 배경은 선지자 이사야가 보는 천상(天上)의 회의입니다. 하나님과 수많은 천사가 모여 있는 자리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자신과 천사를 아울러 하시는 말씀입니다.
천상회의라는 개념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익숙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창세기에서의 우리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아우르는 말씀임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창조 기사로 돌아와 봅시다.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고 대하실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혼자서 창조하시고 기뻐하시는 모양새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릅니다. 하나님과 온 천사가 다 인간의 창조에 동원되는 모양새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이 천사들의 도움을 받으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표현이 그런 만큼 하나님께서 인간 창조는 각별히 신경을 쓰시고 전력을 쏟아부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잠시 후에 볼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에너지 소모가 크셔서 쉬셔야 한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앞장서 쉼을 선언하실 정도로
만물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충만한 사랑을 쏟아부으시며 이루신 일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본 인간 창조의 본문들은 이처럼 사실관계를 시시콜콜히 따지기보다 인간 존재의 존귀함과 특별함으로 여겨야 합니다.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형상이라는 말을 놓고 여러 사람의 해석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성경을 보다가 문맥상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는
보통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같은 단어가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찾아보면 어느 정도 실마리가 풀립니다.
많이 갈 필요도 없습니다. 율법서까지만 읽어도 (출 20:4) 그 어떤 것의 형상도 만들고 절하며 섬기지 말라고 금지하시는 2계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많은 이방민족의 우상도 섬겼습니다만
우상을 만들어놓고 이 우상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예배드리다가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을 받은 일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다른 피조물이 대체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왜인줄 아십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바로 우리 인간만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형상이라고 하니 눈에 보이는 눈코귀입, 팔과 다리, 몸통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만이 고유하게 행하실 수 있고, 존재하는 방식이신 그분의 통치하심, 그분의 사랑하심, 그분의 위대하심을
그분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이 그대로 위임받았음을 알리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다스리라에 해당하는 단어는 마치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처럼 그렇게 돌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는 위대한 일, 양과 같은 세상을 목자처럼 돌보며 하나님께로 안내하는 사명은
오로지 인간에게 맡겨졌습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피조물도 세상을 다스릴 수 없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에게, 다른 우상에게 그 사명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다른 우상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입니까?
이만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른 피조물 위에 세워 주시고 특별하게 대우해 주십니다. 긴밀한 관계를 가지십니다.
지금까지 다른 피조물은 만드시고는 보기에 좋으셨다, 정도의 언급만 있거나
거기에 좀 더해도 생육해라, 번성해라, 충만해라 일방적으로 명령하시는 수준이었는데
인간만큼은 (27절)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고도 하시고, (28절) 직접 인간에게 말씀하기도 하시고, (29절) 너희라고 직접 지칭하기도 하십니다.
그 어떤 피조물도 그런 대우를 받지 않았습니다.
2절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2장으로 넘어와 2절에서는 하나님이 ‘마치시니...그치고...안식하시니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모두가 같은 말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안식에 해당하는 [사바트]는 영어의 STOP과 의미가 같습니다. 어떤 동작이나 일을 멈추는 것을 말합니다.
일하는 것과 쉬는 것은 창조의 질서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정하신 삶의 방식입니다.
쉬지 않고 계속 일만 하는 것도 창조의 질서와는 거리가 멀고, 일하지 않고 계속 쉬기만 하는 것도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 지쳐서 쓰러져 계시지 않습니다. (3절)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안식하십니다. 평화롭게 보내십니다.
피조물을 보시며 만족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 인간이 안식일을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의 훌륭한 길잡이가 됩니다.
긴 시간이 지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고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은 계명을 통해 다시 안식을 말씀하십니다.
바로왕의 압제에서 신음할 때 안식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죽을 때까지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창세기의 그 말씀 그대로 다시 말씀하십니다. (2절) 마쳐라. 그쳐라. 안식하라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똑같은 세상, 바로왕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왜 일해야 하는지도 잊어버리고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도 잊어버리고 오로지 일, 일, 일만을 외치면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위해 멈추라고 하십니다. 마쳐도 안 죽습니다. 그쳐도 안 망합니다.
멈추고 하나님을, 참생명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식일에, 주일에 예배드립니다. 멈춰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삶의 참된 생명은 내가 일하면서 얻고 쌓아놓는 수확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있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날입니다.
인간에게 복을 주시고 인간을 거룩하게 구별하시며 인간을 특별히 여기시며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는 날입니다.
여러분의 매일이 하나님과 사랑으로 교제하는 안식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시고, 여러분에게 지어주신 여러분의 가정과, 학교와, 일터와, 교회공동체와, 지역이웃과,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으시고 다스리고 경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영광스러운 사명이며 오로지 우리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태초의 인간, 영광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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