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난 사람을 마주한 적이 있으십니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분명히 있겠지요.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를 낼 때 자기 할 말 다 하고 성질을 부리는 사람은 하수입니다.
그런 사람은 더 큰 소리로 제압하거나 논리로 꺾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쉽습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분명히 화가 났는데 말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정말 무서운 관계는 무엇일까요? 욕을 하고 못살게 굴고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빤히 앞에 있는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관계가 가장 무서운 관계입니다.
정말 미우면 상종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미움보다 더한 무서운 관계입니다.
1절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
어린양께서 일곱 번째 인을 떼실 때, 요한은 뜻밖의 장면을 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앞두고 있는데 불벼락을 마구 퍼부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큰 소리도, 즉각적인 재앙도 아니라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해지는 침묵입니다.
심판의 절정 앞에서 하늘이 숨을 고르는 듯한 이 침묵은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시거나 망설이신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곧 시작될 나팔 재앙의 엄중함을 보여 줍니다.
12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그런데 나팔 재앙을 시간 순서대로,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 하면 여러 어려움이 생깁니다.
(6:13) 여섯째 인이 열릴 때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이 떠나갔습니다..
(8:12) 그런데 이후의 넷째 나팔에서는 해와 달과 별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진다고 합니다.
이미 하늘이 날아가고 없는데 어떻게 해, 달, 별이 또 어두워집니까?
이렇게 모든 장면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는 요한계시록이 사건의 순서를 설명하려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강조하는 책임을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주제입니다. ‘언제, 어떻게’보다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입니다.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자극적이기 때문에 흥미는 있습니다만) 자꾸만 사건에 함몰되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단이나, 많이 나가버린 우리 선배들과 다를 것이 없어집니다.
‘신용카드를 쓰지 마라, 베리칩 받지마라, 세계정부가 등장한다, 교황이 적그리스도이다.’
1980년, 90년대 세기말을 장식한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21세기가 되면서 죄다 헛말이 되어버렸는데 이젠 누굴 또 공격하렵니까?
새로 나타나는 인공지능 보고 적그리스도라고 하시겠습니까?
보나 마나 그런 사람들이 등장할 것입니다. 그 결말도 너무나 빤합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흐지부지되면 또 다른 공격 대상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외부의 적을 공격해서 자기 존재감을 뽐내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모두의 우스갯거리가 되었던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행태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 제사를 드리면, 그래서 비가 내리면 영험한 무당입니까?
맞을 때까지 계속 예측을 던지고 아니면 말고 식의 기우제 같은 연구는 (그것을 연구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만)
성실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수많은 신학자와 오늘도 말씀과 씨름하는 수많은 설교자에 대한 모욕입니다.
계시록은 그렇게 특정 시기에 나타나는 특정 대상에 끼워 맞춰서 해석하는 책이 아닙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시작과 끝이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과거) 세상을 어떻게 구원하셨고, (현재) 어떻게 경영하시고, (미래) 어떻게 영원한 승리를 이루시는지를 말하는 책입니다.
4절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성도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때에 누가 갑자기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일하신다. 식이 아닙니다.
(과거) 성도의 기도는 애초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현재) 지금도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을 포함해서 누군가는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고,
(미래) 앞으로도 누군가는 기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또 다른 천사가 금 향로를 들고 많은 향을 받아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장면을 봅니다.
하늘의 침묵은 기도의 부재가 아니라, 기도가 응답 되기 직전의 침묵입니다.
그 천사는 향로에 재단의 불을 담아 땅에 쏟습니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일어납니다.
이는 성도들의 기도가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가 무엇을 담고 있어야 하는지도 보여줍니다.
그 기도는 단순히 개인의 평안만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악한 세력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속히 임하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에 분명히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는 결코 공허하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종말론적 사건들의 전개, 즉 하나님의 구원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7절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땅이 타버리고...8절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바다가 피가 되고...10절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11절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12절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나팔 재앙의 중요한 특징은
- 그 범위가 온 세상에 이르며
- 무분별한 파괴가 아니라 구원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째와 둘째 나팔은 땅과 바다를, 셋째 나팔은 강과 물을, 넷째 나팔은 해와 달과 별입니다.
종말의 재앙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피조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롬 8:21-22).
이처럼 인간의 죄는 개인의 삶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전체를 신음하게 만들었습니다.
종말의 재앙은 이 신음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입니다. 온 세상이 아파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진통을 동반해야 합니다.
이 엄청난 진통은 온 세상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나팔 재앙은 자연스럽게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압제 아래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재앙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던 악한 권세에 대한 심판이자 구원의 신호였습니다.
요한계시록도 같은 구조입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 아래 고통받던 성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악한 세력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이처럼 종말론적 구원과 종말론적 심판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7절 땅의 삼분의 일...수목의 삼분의 일...8절 바다의 삼분의 일...9절 바다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배들의 삼분의 일...10절 강들의 삼분의 일...11절 물의 삼분의 일...
하나님의 뜻이 구원에 있다는 것이 이 단어에서도 드러납니다
재앙들이 마구잡이로 사람을 몰살시키기보다는 삼분의 일만을 해치는 제한된 재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차별적인 파괴를 즐기시는 분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나팔 재앙은 최종적인 멸망이 아니라, 속히 돌이키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경고를 듣고 깨닫지만, 어리석은 자는 깨닫지 못해 결국 더 큰 재앙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나팔 소리가 울리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전쟁과 기후 재앙, 사회적 혼란과 자연의 신음은 우연한 사건들이 아닙니다.
뉴스를 멍하니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기도의 제목으로 품으셔야 합니다.
이것들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착각하는 세상에 주시는 경고입니다. 나팔 소리입니다.
14절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경고인 동시에 회개의 촉구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날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신뢰하며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며,
침묵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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