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6장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印)을 떼시는 장면입니다.
고대의 중요한 문서는 봉인하는 방법이 따로 있었습니다.
문서를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종이가 풀리지 않도록 하고
종이가 서로 겹치는 부분에 끈적한 밀랍이나 풀을 위에다가 붓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붓고 난 이후에 위에다 도장을 찍어서 굳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적어도 그 문서는 봉인된 문서입니다.
그 문서가 전달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딱딱하게 굳은 봉인을 부수거나 뜯지 않는 이상 다른 이들에게는 대외비인 셈입니다.
만약 이미 봉인이 뜯겨 있다면 그 문서의 내용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무엇을 감추고, 숨기고, 비법이나 비기(祕機) 따위를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계시라는 말 자체가 드러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당신의 구원의 뜻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서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봉인 해제하시는 권세를 가진 분이 바로 십자가를 지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뜻은 완전히 공개되었습니다.
이단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슨 해설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관계는 많은 신학자 사이에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동의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모든 환상이 하나님의 통치와 역사의 완성이라는 하나의 큰 메시지를 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도 여러 숫자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숫자들은 문자 그대로보다는 상징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든지, 이상한 그림이 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일곱은 (여러 번 말씀드린 것 같이) 하나님의 완전함과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곱 인은 우연히 발생하는 재앙의 나열이 아니라,
완전하시고 충만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허락된 역사적 과정을 가리킵니다.
완전하시고 충만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시기에 그 일은 완전할 것입니다. 그 일은 구원과 사랑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는 숫자를 계산하려 애쓰기보다, 숫자가 전하려는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2절 흰 말이 있는데 4절 붉은 말이 나오더라 5절 검은 말이 나오는데 8절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어린양이 네 인을 떼실 때 네 말이 등장합니다. 흰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입니다.
이 말들은 각각 정복, 전쟁, 기근, 사망을 상징합니다.
친절하게 바로 뒤에 설명이 나옵니다. 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중 친히 예언하신 재난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전쟁과 기근, 질병과 죽음은 특정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역사 전반에 반복되어 온 현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눈물 흘리고 아파하는 모든 문제가 무슨 대단한 새로운 것이 있습니까?
우리의 부모 세대가 씨름했고, 신앙의 선배들이 눈물 흘렸던 문제들 아닙니까?
그 문제는 오늘 여전히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세계가 전쟁과 기근과 무고한 죽음으로 몸살을 앓는 것처럼
내 삶에서도 전쟁처럼 치열한 문제가 있고 기근 같은 공허가 있고 사망 같은 두려운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여전히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이 재앙들이 모두 하나님의 진노일까요?
분명한 점은 이 재앙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과 그 결과를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든 고난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계시록의 심판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악인들입니다. 악인을 향합니다.
여기에서의 악인은 무슨 특별히 나쁜 행실을 하고 다녀서 악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전형적인 세상의 사람을 말합니다.
12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여섯째 인이 열리자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해와 달과 별들이 흔들립니다.
왕들과 장군들, 부자와 강한 자들이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산과 바위에게 자신들을 가려 달라고 외칩니다.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의 날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거룩하고 참되시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없다면 정의도 없습니다. 끝까지 회개를 거부한 자들에게는 반드시 심판이 임합니다.
고난과 심판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인생의 고난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 신앙과 무관한 고난,
-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고난,
-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면하는 고난입니다.
이 중에서 계시록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받는 고난을 매우 귀하게 다룹니다.
성도는 의미 없는 고난을 겪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유의미한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이 많은 고난을 지나는 것도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단, 그것이 내가 먹고 사는 것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계시록에서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께서 억울함을 들어주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과연 내 삶의 문제는 내가 그리스도인인 사실과 얼마나 상관이 있는지 돌아볼 문제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힘든 것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다 똑같이 겪는 일입니다.
고난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 까지도 없습니다.
내가 먹고 사는 것에 바쁘고 힘든 것을 굳이 말씀까지 끌어와서 고난이라고 감정이입하며
혼자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굳이 하나님이 갚아 주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9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다섯째 인이 열릴 때, 요한은 하늘 제단 아래에 있는 순교자들의 영혼을 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요한 자신도 같은 이유로 밧모섬에 유배되지 않았습니까?
이 순교자들은 (10절) 억울하다고, 우리의 피를 갚아달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리스도인이기에 당당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흔들리고 우주적인 재앙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시선은 고통받는 당신의 백성에게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정한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지연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때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 때가 다가오는 것을 믿음으로, 기쁨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6장에서 종말의 때에도 여전히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녀이기에 당당하게 하나님께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될 줄로 믿습니다.
새벽을 깨우며 이 말씀을 붙드는 우리 모두가,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과 아픔, 외로움과 모든 슬픔을 이겨내고
주님과 함께 승리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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