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제 말씀에서 참된 안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11절) 참된 안식은 순종입니다. 왜 순종해야 합니까?
(13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 드러내시는 두려운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 순종은 우리에게 족쇄며 짐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의지로 충만하신 하나님에 대한 화답입니다.
(14절)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힘입어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15절) 그 대제사장이신 예수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시며
(16절)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4장에 이어 5장에서 계속해서 (1) 대제사장 직분의 조건, 혹은 덕목과
(2) 그 조건과 덕목의 성격을 통해서 드러나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3) 더 나아가 우리는 이 본문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보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1절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4절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대제사장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왜 예수님이 인간이셔야 했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십니다.
존재 자체가 곧 연약인 우리 인간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시편에서는 이렇게 연약한 인간 존재를 가리켜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굽어살피십니다.
벌써 이런 표현들만 봐도 얼마나 인간 존재가 덧없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귀함은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얻는 것입니다.
부르심도 마찬가지로 타인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인간을 존귀하게 하시고 인간을 부르시는 권위는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덧없고 연약한 인간을 선택하셨습니다.
- 지혜롭고 존귀하기로는 천사가 인간보다 훨씬 낫습니다.
- 강하기로는 짐승이 인간보다 훨씬 낫습니다.
수많은 피조물이 인간보다 나은 무엇인가가 있고 인간은 딱히 뾰족한 것이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셔서 (1절)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이처럼 대제사장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직책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야지만 설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주셨는지 깨닫는 (인간) 대제사장은
(2절)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즉 무지하고 유혹에 빠진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용납한다고 번역되었지만,
원문에서는 (감정을) 다스린다, 자제한다. 정도로 볼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야 3절이 매끄럽게 연결이 됩니다. 개인적으로 번역해 보자면
" 대제사장은
(2절) 무지하고 유혹에 빠진 사람을 위해 나의 감정을 다스리고 자제할 수 있습니다.
(3절) 백성을 위해서 속죄제를 드리는 것처럼 자신을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대제사장은 이처럼 자신을 다스리고,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드림으로써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를 믿기로 결단한 유대인들의 믿음이
(14절) 장성한 수준으로 자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장성한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7절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의 소원을 올렸고... 8절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14절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믿음의 모범을 이야기하면서 히브리서 저자가 고난을 바로 언급하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믿음의 모범을 저자가 5장에서 설명하면서
고난 말고 다른 개념은 아예 언급하지도 않는다는 사실도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 가지고 살면 고난이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착각입니다.
고난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옵션이 아닙니다. 신앙은 곧 고난입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러셨고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예수님은 극심한 고난 중에도 자신의 뜻을 내세우거나 관철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 우리가 4:13에서 본 것처럼)
예수님의 이런 생각을 모든 사람 앞에 다 드러내셨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을 감당하겠다는 그분의 생각이 십자가에서 다 드러났고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9절) 그렇게 하심으로서 예수님은 장성한 믿음의 모범이 되십니다.
이 모범을 따라가는 모든 사람들을 영원히 구원하십니다. 구원의 행렬입니다.
예수의 모범을 따라가는 우리는 고난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고난은 아픔 자체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깨달음이 있어야 고난입니다.
깨달음이 없는 고난은 그저 절망과 눈물일 뿐이며 빨리 지나가고픈 터널일 뿐입니다.
야곱의 고백처럼 '험악한 세월(창 47:9)'을 보낸 분들은 교회 안에도 많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인내의 시간과 전혀 비례하지 않는 가벼운 인품, 황당한 신앙을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고난을 그냥 어찌어찌 지나기만 했지, 그 시간을 통해 깨달은 것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고생을 하면서 강해지지 않는다면 사람은 기괴해질 뿐(be strange)" 이라는 영화<조커(Joker)>의 대사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정도 통찰은 합니다. 우리의 통찰력이 그들만도 못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장성한 자의 여정(旅程)은 다릅니다.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은 분별의 능력과 성숙함을 꾸준히 훈련받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슬퍼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수준에 이릅니다.
11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을 설명하면서 유대인들의 믿음이 여전히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둔감했습니다.
(12절)
a. 신앙생활을 한지는 오래되었습니다.
b. 이 정도이면 진작에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한 상황입니다.
그 원인에 대해 12절에서 저자는
(1) c. 누구에게도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고
(2) d. 단단한 음식을 피하고 젖이나 먹었다고 꼬집고 있습니다.
듣기 좋은 말씀만 골라 들으니 영적 성장이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놀랍게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오늘 한국교회와 다음 세대에 그대로 적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말씀입니다.
a. 신앙생활을 한지는 오래되었습니다.
b. 이전 세대가 고등부를 졸업하면 이미 주일학교 교사를 했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인데
지금 청년들과 30,40대는 주일학교에서 누구를 가르치는 것은 고사하고
그 긴 신앙생활 기간이 무색할 정도로 성경에 대해 모릅니다. 당연히 하나님도 모릅니다.
c.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르침 받는 것을 꺼립니다. 피합니다.
d. 신앙의 현실을 꼬집고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는 교회와 사역자는 인기가 없습니다.
대신 지극히 개인적인 수준의 위로와 사탕발림에 가까운 감성 터치, 처세술, 마인드컨트롤, 자기 계발로 범벅이 된 메시지와
문화공연과 다를 바 없는 퀄리티의 예배가 제공(?)되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몰려듭니다.
이처럼 아무런 사역도 하지 않아도 되고 책임도 안 져도 되는 큰 교회로 사람들이 수평이동합니다.
부담이 없는, 쾌적해 보이는 중대형교회만 부흥합니다.
이는 고스란히 지역교회, 개척교회의 고사(枯死)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우리 선배들이 경험했던 부흥과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침묵하고 있습니다. 초보 신앙인의 대량양산입니다.
이러다 보니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젖만 먹다가 갑자기 고난이 닥치면 흔들리는 어린아이의 믿음이 아니라
단단한 의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이해하고 유혹을 이겨내는 장성한 믿음입니다.
경건의 훈련에 게으르지 않고 힘쓰는 자가 예수님의 모범의 뒤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 주님의 뒤를 따라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는
나, 우리 가정, 우리 교회 되게 하소서. 말씀 붙잡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 아침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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