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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빌 2:1-11)
 
[7월 7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빌 2:1-11)
2025-07-07 00:00:00
손병호
조회수   15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자신을 후원해 준 빌립보 교회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교회를 흔드는 거짓 교사에게 경고하기 위해 편지를 씁니다.

그 편지가 오늘 우리가 읽는 빌립보서입니다.

교회의 상황이 어렵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관용의 삶을 사는 것이

모든 역경을 이기는 능력이라고 권하는 편지입니다.

(별로 공감도 안 되는데 억지로 연기하는 식으로 강 건너 불구경하는 느낌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옥중에 있었습니다. 누가 누굴 위로하겠습니까?)

 

빌립보서를 지배하는 단어는 기쁨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자기 자신까지 예로 들어가면서

(누가 자신의 이런 이야기를 예시로 들겠습니까? 전과(前科)는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정말 복음에 미쳐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습니까?

그에게는 정말 복음 이외에는 심지어 자기 자신도 어떻게 되든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삶의 중심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옮길 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잠시 살펴본 1장의 개론을 넘어 2장에서도 바울은 같은 맥락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2절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교회는 (1) 권면도 할 수 있고 위로도 하고 교제도 하고 긍휼도 자비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모든 행동에는 동기가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권면합니까? 왜 위로합니까? 왜 교제에 열을 올립니까긍휼과 자비라는 간판을 붙이고 사역은 왜 합니까?

 

(권면, 위로, 교제, 긍휼, 자비 다 좋은 이야기입니다.

비단 교회 안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똑같은 사랑이라는 단어 아래 수만 가지의 다른 삶의 모양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많은 사랑의 대부분은 자기만족, 자기 기쁨처럼 변질, 왜곡되어 있고

심지어 사랑의 가면을 쓰고 정욕의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랑이랍니다.

정욕은 자기만족, 자기 기쁨을 위해 상대를 도구화하는 이기(利己)의 극단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기도 민망합니다. 이런 홍수 속에 정작 생수 같은 사랑은 없습니다.

썩은 물이 범람하지만 그렇다고 멋대로 마시면 탈이 나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본인도 죽고 남도 죽입니다.)

 

그래서 가 중요합니다.

그냥 사랑을 하면 되는 것이지 같은사랑이 무엇이 중요하냐고 물으실 수 있지만 아무 사랑이나 하면 안 됩니다. 그래야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같은 사랑, 동기를 통일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다가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자기를 망치고남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제각각의 사랑이 아니라

 

같은 사랑, 우리가 한 방향으로 지향해야 하는 단 하나의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은 다릅니다. 십자가를 통해 만나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2절 한 마음을 품어...5절 이 마음을 품으라

반복되는 품는다라는 단어는 계속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심사숙고하라는 말입니다.

생각이 계속되면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나를 지배합니다.

내 말과 행동을 결정합니다. 말과 행동이 쌓이면 삶이 됩니다.

 

계속 생각한다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품으라는 말은 완전히 내 삶으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놀랍게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인)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하고 뜻을 합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 동기를 통일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뜻을 어떻게 합칩니까? 한마음을 대체 어떻게 품습니까?

세상을 보십시오. 두세 사람만 모여도 의견이 갈립니다10, 20명이 넘어가면 서로 정신이 없습니다.

100명 이상 되는 집단은 한마음을 포기해야 합니다가장 다수에 얹혀서 가면서 나머지 소수를 설득하면 잘하는 편입니다.

그나마도 하지 않고 고집부리다가 파국을 맞는 리더가 즐비합니다.

교회도 교단이 수백 개이고, 이 좁은 나라도 남북으로 나뉘어져서 으르렁거립니다.

그런데 하나가 된다고요? 바울은 불가능해 보이는 이 임무의 비결을 3절에서 말합니다.

 

3절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예수님께서 원수였던 우리 인간과 하나님을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기억해 봅시다.

- 우리 인간끼리도 서로 하나가 되어 주님의 몸인 교회를 이루게 하신 것을 기억해 봅시다.

이렇게 하나 되게 하신 주님의 삶의 핵심은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의 핵심을 가리켜 바울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라고 간결하게 정리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가만히 뜯어보면 도무지 내 눈에 안 차는 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그분의 눈에 과연 우리 인간 중 누가 차겠습니까?

과연 우리 인간 중 누가 감히 그분의 상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심지어 우리 인간 중 누가 감히 그분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겸손을 가리켜 자기보다(=즉 예수님 자신보다) 남을(=인간을) 낫게 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8절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품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완전히 자기의 삶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분은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인간이 예수님보다 나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6) 그는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처럼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

겸손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볼 때

(7)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노예의 삶을 취하셨습니다. 사람과 똑같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걸 왜 내가 해야 합니까? 억울한데요, 라고 선을 긋고

자기 손해, 자기 피해는 손톱만큼도 못 견디고 안달하는 오늘날의 세대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의 선배들은 시간과 물질이 남아돌아서 교회를 섬기고 충성하고 헌신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 자기 삶을 희생합니다. 헌신합니다. 그러면서 여기까지 무려 2천 년을 왔습니다.

 

희생과 헌신은 2천 년을 내려온 성경의 기본 정신인데

이것을 버리고서 합리를 추구한다고 해서 무엇이 되리라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합리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모든 사역자에게 합당하게 사례비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목사뿐만 아니라 교사와 성가대, 모든 봉사자가 대가를 받아야지 합리적 아닙니까?

그도 아니라면 모두 용역을 주고 교인들은 모든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과연 그렇게 운영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까?

우리의 자녀에게 너희도 이렇게 사역하는 그것이 옳다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선배들은 왜 2천 년이나 지내면서 이런 좋은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합리적이라면서, 왜 찜찜합니까?

(세상은 양심이라고 말하지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심겨주신 씨앗이 있기 때문에 당연하게 찜찜합니다.

성경의 정신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본능적으로 이건 아닌데?’를 분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대체 무슨 잘못이 있으셔서 십자가까지 지셨단 말입니까?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의 죄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말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대가로 하나님께 무슨 부귀영화를 얼마를 받으셨습니까?

 

여기까지만 봐도 대가를 따지고 합리와 평등으로 포장한 오늘의 시대정신이

얼마나 성경의 본질과 거리가 먼 것인지는 우리가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나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고집대로 살고 싶은 세대가 있을 뿐입니다.

어설프게 교회 안에서 따지고 계산하면서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교회를 시원하게 벗어나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이 피차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구원은 합리와 평등과 대가를 따질 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가를 포기하고, 평등을 포기하고, 합리를 포기하고, 심지어 내 생명까지 포기할 때 이루어집니다.

 

10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구원의 문이 열립니다. 구원을 위한 하나 됨입니다. 구원을 위한 통일입니다.

 

(2) 한 뜻, 한 마음으로 하는 사역입니다.

(5)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3) 겸손한 마음입니다. 구원의 문을 여는 능력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다른 세상의 사랑, 그리고 우리 개인 제각각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겸손으로부터 나오는 사랑, 하나가 되도록 하는 능력으로 충만해서

세상을 구원하고 (11)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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