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복음을 불완전한 반쪽짜리 진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쉽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율법이나 할례 같은 유대적 요소들을 빼었다는 것이 그 주장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며
자신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다고 웅변합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시작한 것도 아니고 사도들의 권위로부터 시작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은혜의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2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그를 부르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합니다.
(1절) 교회의 핵심 멤버인 사도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머무르고 있었을 텐데
- 바울은 그가 회심하고 난 이후 14년이나 지나서야 예루살렘에 들릅니다.
바울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 그는 한술 더 떠서 이방인 사역자를 대동해서 갑니다.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체 저 사람은 무엇인가' 싶은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수고로 인해 이방인들이 드디어 교회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함께 일하는 사역자 중에서도 이방인을 데리고 돌아다니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어찌 봐줄 수 있는데 치명적인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할례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단순한 통과의례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방인을 경멸할 때도 할례받지 않은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을 경멸하는 표현은 성경에 무려 39번이나 나옵니다.)
할례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는 말입니다.
이방인이 만약 유대인이 되고 싶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니 유대인 그리스도인 중에서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들의 맥락에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심지어 초대교회 안에서 유대인들의 세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으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사도들까지도 유대인의 눈치를 보느라 이방인 전도에서 뒤로 물러났다는 것입니다.
(12절)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절)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바울은 오늘 12, 13절에서 그 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로서는 창피한 에피소드를 추가한 셈입니다.
바울의 공개적인 비판에는 유대인의 삶과 이방인의 삶이라는 두 큰 울타리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음에도 율법에 얽매여 외식하는 삶은 진리를 따르는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주장은 예수를 따르는 삶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14절)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예수를 믿으려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 이야기가 우리와는 시대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너무나 큰 격차가 있으니
별로 실감하지 못합니다만 우리 정서로 바꿔서 생각해 보면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누구든지 세상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환영하는데
우리 방식대로 정착해 주기를 바라는 기존 교인들의 모습, 혹시 나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그것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바뀔 생각은 없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바뀌기를 바라는 모습입니다.
유대인이 먼저 되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라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모습은
우리 교회 교인이 먼저 되고 그다음에 예수를 믿든지 식의
한국교회의 어리석은 모습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남을 바꾸려고 하지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바꾸라고 하면 이기적인 것처럼 보이니까
원칙과 관례 등 상대가 반박하기 어려운 온갖 것들을 꺼내어서 상대를 바꾸려 합니다.
이러면 텃세가 기본인 세상의 모임과 교회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모임이야 어차피 나의 유익을 도모한다는 뻔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교회는 영혼 구원이라는 대사명(大司命)이 있습니다.
영혼을 놓치면서까지 지켜야 할 원칙, 지켜야 할 관례란 무엇입니까?
그것을 붙잡고 있는 나는 누구입니까?
할례는 너무나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늘 이런 상대적인 것에 함몰되어 절대적인 진리를 놓친 안타까운 역사가 있습니다.
- 중세 교회가 변화를 거부했기에 종교개혁이라는 몸살을 앓았습니다.
- 근대 교회가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세상의 질문을 무시했기에 수많은 신자가 떠났고
오늘날까지도 유럽교회는 주저앉은 채 일어설 생각도 못 하고 있습니다.
- 똑같은 기조를 고수하려고 하는 남미(南美)교회가 외치는 신앙은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개인용 샤머니즘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 한국교회라고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신자 대상 여론조사에서 언제나 선호도 최하위를 달리는 기막힌 결과는 우리의 작품입니다. 누구 탓을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남을 바꾸려 하지 내가 바뀔 생각하지 않는 우리의 자업자득입니다.
세상이 교회에 호감 가질 리가 없습니다. 이러니 전도가 될 리가 없습니다.
(3절)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바울은 디도에게 할례도 받지 않도록 합니다.
이방인이 예루살렘 성전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으나
바울은 디도를 존중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디도와 그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며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대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일종의 살아있는 시청각 자료인 셈입니다.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사도는 칭의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값없이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를 지키는 유대인처럼 사는 것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삶이 지닌 의미를 웅장하게 표현합니다. 마치 한편의 교향곡 같은 느낌입니다.
(19절) 율법에 대해서는 죽은 삶,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삶, 더 이상 율법의 강요를 받지 않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살았으니, 율법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되는 삶이기도 합니다.
이 삶이 바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붙잡고 그 믿음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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