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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갈 1:11-24)
 
[5월 13일]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갈 1:11-24)
2025-05-13 00:00:00
손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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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율법과 행위를 중시하는 갈라디아 교회의 율법주의자들에 대해서

나도 행위로 따지면 결코 모자라지 않다는 투로 말합니다.

 

(13)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그는 유대교에 단순히 몸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할 정도로 유대교의 충성스러운 교인이었습니다.

 

(14)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연갑(年甲)자라는 말은 동년배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동기들과 비교해도 바울은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할 정도였고

조상의 전통에 대해 열심, 뜨거운 마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15)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왜 하필 어머니의 태 이야기를 합니까?

지금 그 사실이 유대교와 율법의 전통과 그의 열심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16)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어제 우리가 은혜와 평강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을 생각해 봅시다.

어머니의 태에 있는 아기는 가장 연약한 존재입니다어머니가 지켜주지 않으면 무방비상태입니다.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어머니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어머니 뱃속의 아기가 무슨 공로가 있어서 출산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어머니의 보호와 수고와 공로로 태어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는 것도 전적인 은혜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부르심은 우리가 무엇인가 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었을 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철저히 의지해야 하는 약한 상태일 때 임하는 것입니다.

   

(16)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17)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바울의 사도됨은 (인간) 유대인들과 논의한 사실도 아닙니다(인간) 사도들과도 논의한 사실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는 유대의 배경과 전혀 상관이 없는 아라비아로 떠나서 시간을 보냅니다.

나를 부르신 이가 정말로 하나님이신가? 인간적인 간섭의 여지를 하나도 두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과 단독으로 마주하고 싶었던 사도의 몸부림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사도됨은 율법과도 무관합니다. 인간적인 권위에 의존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발견합니다. 자기를 선택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전적인 주권으로 선택하셨음이 100% 확실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 밖에 없으며 다른 복음을 전하면 심지어 (8) 저주를 받는다고 경고합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확신에 찰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12)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가 이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12절에서는 계시라고 하고 16절에서는 그(예수)를 자기 속에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어떤 대적자들은 바울이 생전에 예수님을 만나본 적도 없을텐데

예수님을 직접 모신 사도들과 어떻게 동급으로 취급할 수 있는가,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았다는 말을 할 수 있냐, 만난 적도 없는데라고 트집을 잡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2,000년의 시간 차를 두고 살아가는 우리가 겨우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구역모임을 하고 책을 읽을 뿐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닙니까그런데도 감히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우리가 고대의 지혜자들의 글을 읽거나 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저서를 읽었다고 하지

그들을 만났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그 지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왜 그들을 만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을 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가 다메섹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실제로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묵상과 기도와 독서와 예배와 영적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강력한 이유는 실제로 주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살아계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십니다. 나타내십니다. 계시하십니다.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에게 예수님을 나타내십니다. 계시하십니다.

 

계시는 곧 은혜입니다. 계시가 왜 은혜입니까?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무슨 수로 먼저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의 길을 어떻게 먼저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그럴 지혜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머리도 힘도 없으니 당연히 결과도, 공로도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고 정하신 그때는 바울이 복음을 위해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극악하게 교회를 핍박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영적인 어린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어머니가 아니면 아무런 존재라고도 할 수 없는 태중의 존재였습니다.

구원과 거리가 너무나 먼 존재였습니다. 그런 그때

(16)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선택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정하신 그때는

우리가 복음을 위해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 실제로 어머니의 육체의 모태에 있던 분들도 계시고

- 육체적으로는 장성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지도자와 보호자가 없이는 아무런 존재라고도 할 수 없는

영적 유아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래나 저래나 구원과 거리가 너무 멀다는 공통점은 확실합니다.

그런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십니다. 심지어 기뻐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주님을 만났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분이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18)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3년 만에 돌아와서는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기까지였습니다. 더 많은 사도를 만나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오해를 받았지만 사람의 인정과 권위에 기대어 일하려 하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고 우리를 통해 그분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 사명, 기쁨으로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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