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계준 장로
 
sub01_04.jpg 유계준 장로 (1879-1950)

유계준 장로는 1879년 4월 3일 평남 안주에서 불신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13살에 평양으로 나왔다. 그 후 평양의 한 무역상의 사환으로 들어가 10여 년간 일하다 윤덕준 권사(1885~1975)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러하다. 미국인 선교사 사무엘 모펫이 평양시내에서 전도하는 것을 보고 선교사를 구타하는 등 선교를 방해하였으나, 그렇게 맞고도 예수 믿으라고 권유하는 그에게 설복되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 그 후 평양에서도 유서 깊은 산정현교회의 교인이 되면서 한경직, 길선주, 주기철, 김규찬 목사 조만식, 오윤선, 안창호 장로들과 가까이 교제하며 어두워져 가는 한국과 한국교회를 밝힐 횃불이 되기로 결단하였다.

특히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44년 4월 감옥에서 순교할 때까지 5년 4개월을 한 결 같이 그의 옥바라지와 가족 뒷바라지를 맡아 해냈다. 결국 이 일로 평양 경찰서에 소환되어 일본인 경찰들에게 협박당하면서도 "우리 교회가 교역자라고 모시고 있는 목사님이 지금 감옥에 들어가 고생을 하고 계시는데 그 가족의 생활비마저 어떻게 안 드릴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산정현교회가 이렇게 시대를 이겨 나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묵묵히 옹호하는 장로들의 힘이 컸다. 유계준 장로를 비롯한 조만식, 오윤선 장로들은 담임목사가 행여 항복하거나 배절 할까봐 걱정할 정도로 정신적 기반이 든든했다. 당시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였던 유계준 장로는 사재까지 들여가며 교회의 일을 도모해 나갔으며, 특히 주기철 목사가 순교하자 일제의 금지령을 어기고 성대한 장례식을 치뤘다. 해방 후 공산정권이 교회를 적산가옥이라고 압수하자 자신의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했다. 6.25당시에는 가족들을 남하시키고 혼자 교회를 지키다가 평소 자녀들에게 일러온 '한 알의 밀알이 되라'는 가훈대로 1950년 10월 퇴각하는 공산군에 의해 순교했다.

유계준 장로는 슬하에 8남매(6남2녀)를 두었는데, 증손자까지 합하면 106명에 이른다.
1남 유기원 - 하바드大박사 (국립의료원 원장)
2남 유기정 - 서울대 치과의사 (기독의사회장)
3남 유기선 - 의사, 박사, (경성약전, 서울대의대, 서울대법대 졸)
4남 유기천 - 서울법대학장, 제9대 서울대총장
5남 유기진 - 의사, 박사
6녀 유기옥 - 의사, 박사
7녀 유기숙 - 약사, 박사 숭실대총장
8남 유기묵 - 의사, 박사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시편 37:2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