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숙 전도사
 
sub01_06.jpg 백인숙 전도사 (1917-1950)

백인숙 전도사는 1909년 평북 신의주에서 출생하였다.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준비된 여성 지도자였던 그녀는 1939년 주기철 목사가 투옥된 이후 오정모 사모와 함께 산정현교회 교우들을 돌보는 일에 대단히 헌신했다. 어릴 때부터 신앙 안에서 성장한 백인숙은 안동여자중학교와 평양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일본에 건너가 요코하마 여자신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30세 나이에 산정현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는데 당시에는 전도사의 호칭이 없었으므로 권사라고 불렀다.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어 옥에 있는 동안 백인숙은 밤이면 교회당에서 기도하고 낮이면 부지런히 교인 가정을 심방하였다. 산정현교회가 일제에 의하여 문이 닫힌 후에도 교인 가정을 일곱 구역으로 나누어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한 구역씩 찾아가 예배를 인도하곤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후 백인숙은 전도사로서 오정모 사모와 함께 산정현교회를 복구하는 일에 혼신을 다했다.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에 여름 옷 한 벌과 겨울 옷 한 벌밖에 없었다. 여름에는 검정 치마에 모시 적삼을, 겨울에는 검정 치마에 무명 저고리를 즐겨 입었다. 이렇게 그녀는 자신을 위하여는 엄격하게 인색하였으나 타인을 위해서는 너그러웠고 풍부했다. 이런 이타적인 사랑은 교회사랑과 나라사랑으로 이어져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기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해방 후 산정현교회가 평양노회 가입 문제와 민족주의 및 신앙주의 노선 문제로 갈등을 빚을 때 민족주의 성향 쪽에 서 있었다.

주기철 목사 순교 후 1948년 2월 부임한 김철훈 목사가 공산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소식이 끊긴 후에는 김 목사의 부인 연금봉 사모와 숙식을 같이하면서 주 안에서 위로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과거 주기철 목사가 투옥되었을 때에도 오정모 사모와 함께 힘을 모아 교우들을 돌보던 아름다운 모습을 이번에도 변함없이 보여주었다. 1949년 김철훈 목사가 순교하고 이어서 부임한 정일선 목사마저 공산정권에 순교하자 백인숙은 산정현교회 목회자들과 교우들을 독려하며 공산정권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기독교연맹 가입을 거부하였다. 철저한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데다 신앙의 절개를 끝까지 지켜 갔던 백인숙은 참으로 순결한 신부였다.

산정현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담임목사를 체포하고 핍박이 그치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교인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공산정권은 아예 백인숙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1950년 6월 25일 사변 며칠 전 그녀를 체포하였다. 공산정권은 백인숙을 회유하고 달랬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그러자 그들은 깊은 구덩이를 파고 위협하여 그녀를 그 안에 넣고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국교회가 낳은 훌륭한 여종, 34세의 처녀 백인숙 전도사는 이렇듯이 정결한 몸으로 우상을 대표하는 강포한 일본의 위력을 믿음으로 이겨냈으며, 무신론의 포악한 공산당의 만행을 일편단심의 신앙으로 물리치고 피로써 사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