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 장로
 
sub01_05.jpg 조만식 장로 (1882-1950)

민족의 큰별, 고당 '조만식'장로는 온 겨레가 일제의 질곡에서 우리의 민족성을 상실해 가고 있을 때 기독교적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순교자적 삶을 산 진실한 애국자였다. 그는 1882년 음력 12월 평안남도 강서에서 명문가 조씨 가문의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5세가 되면서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인수업을 받고 무명과 베를 파는 포목점을 운영하면서 상인의 길로 들어섰다. 1904년 발발한 러-일 전쟁은 상인으로 안주하고 살던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피난전의 대열에서 그의 동업자 한정교와 토론을 통하여 그는 기독교의 박애사상과 인도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그는 그때까지의 옛사람을 버리기로 결단하고 평양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그때까지 즐기던 술과 담배를 끊고 한정교의 인도로 '산정현교회'의 전신인 '장대현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그는 복음을 통하여 그 진리의 말씀에 크게 감화하였다. 그는 약관 23세의 나이에, 더구나 식솔이 딸린 가장으로 만학의 길에 올랐다. 평양숭실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을 갖추게 되었으며 모범 만학도였다. 그의 향학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선진법률제도를 연구하여 조국의 국정에 참고하겠다는 생각에서 일본 명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청년 조만식은 당시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대표적 인물로서 흩어진 동포기독학생들과 함께 동경 YMCA 건물 안에 <제일 조선인 교회> 를 설립, 조국의 운명을 위해 매주 예배와 기도모임을 이끌어갔다. 1913년 귀국과 동시에 그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9년간 교육에 헌신했다.

그의 제자 가운데 한국교회에 크게 영향을 끼친 두 분 목사를 들 수 있는데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순교한 주기철 목사이고 또 한사람은 한경직 목사이다. '물산장려운동' '신간회 창립' '3.1만세운동'주도 등 그의 혁혁한 독립운동 뒤에는 신앙의 힘이 컸다. 그는 '산정현교회'장로로 추대되면서 산정현교회 김동원 장로와 함께 YMCA를 조직, 기독교 청년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언론계에 투신하여 조선일보사 제8대 사장을 역임하였다. 괄목할 만한 사실은 조선일보 경영진 8명중에 4명이 당시 산정현교회 장로와 집사들이었다. 그 무렵 '산정현교회'는 민족주의자가 많기로 평양내서 으뜸이었으며 특히 1938년부터 7년간의 '신사참배반대' 투쟁은 당회원들과 제직들의 피와 눈물의 결과였다.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가족들만 남하시킨 채 자신은 일천만 북한 동포들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결단, 끝끝내 남하를 거부하였다. 민족의 별 '조만식 장로', 그가 가족들과 소식이 끊긴지 40년만인 1991년에 이르러서야 1950년 10월 18일 평양에서 학살되었다는 비보가 비로소 남한에 전해졌다. 그의 유해는 지금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