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훈 목사
 
sub01_03.jpg 김철훈 목사 (1905-1948)

1905년 10월 7일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중학 교목, 용강읍교회, 송산리교회, 삼성리교회를 시무하며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렀다. 그는 네 번에 걸쳐 2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반일투쟁이 거듭되는 가운데 김철훈 목사는 일본 경찰의 꾸준한 감시를 받아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구속 수감돼 고문을 받은 애국목회자이다. 광주학생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평양 시위 주모자로 지목되어 일제에 의하여 투옥되었다. 이같은 그의 민족애적 신앙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아버지 김경덕 목사의 철저한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1939년 농우회 사건 때는 주기철 목사와 함께 구속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농촌청년들을 규합해 반일교육을 했다는 혐의를 두고 일제가 의식 있는 사역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인 사건이다.

1942년에는 김교신의 ‘성서조선’의 필화사건으로 연루돼 고문을 받기도 했다. 해방 후 동평양교회, 산정현교회 등을 시무하는 중에 기독교도연맹 가입 반대와 주일 선거 반대로 공산당의 압박을 받았는데 이를 견디며 조만식 장로가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일원으로 비밀 월남하여 밀서를 이승만 박사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동평양교회에서의 앞날이 보장된 목회를 마다하고 산정현교회가 무너지면 평양에 있는 모든 교회가 무너진다며 고생길을 자처했다. 격동의 세월을 살았던 김철훈 목사는 이후 공산당에 대항하다가 1948년 산정현교회에 부임한지 5개월 만에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44세의 일기로 순교했다.

"나는 순교를 각오한 사람이기에 이왕이면 주기철 목사님이 서시던 강단에서 죽으면 얼마나 좋으냐. 무릉도원 놓고 가시밭길 가는 심정 이해해 달라. 한국교회의 목사로 이해해 달라." 김철훈 목사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부인 연금봉 사모는 김철훈 목사의 순교 후 세 자녀를 업고 대동강을 건너 남으로 피란을 왔다. 연 사모는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순교자 유족들을 위해 도움을 요청했고, 그 자리에서 헌금을 받아 순혜원(순교자 유족을 위한 쉼터)을 세웠다. 1956년에는 함께 남하한 평양 산정현교우들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남편의 뜻을 담아 현 서울산정현교회를 재건한 뒤 전도사로 줄곧 섬겼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공산당의 핍박으로 순교한 목회자 사모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던 연금봉 사모는 지난 2013년 11월 20일 향년 104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